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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당신] 수혈 없이 수술하는 환자 연 700명 … 합병증 발생 80% 낮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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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8일 오전 서울 성북구의 고려대 안암병원 4층 수술실을 참관하기 위해 수술복을 입고 들어갔다. 62세 여성 환자의 심장판막증·부정맥 수술이 시작됐다. 가슴을 열어 심장 판막을 인공 판막으로 교체하는 비교적 큰 수술이다. 수술은 6시간가량 진행됐다.

국내 병원, 무수혈 수술 도입 활발 #자가수혈장비 ‘셀 세이버’ 활용 #흘러나온 피, 성분 분리해 재주입 #감염혈액·면역거부 후유증 없어 #응급환자·중증폐질환엔 적용 못해

이 환자는 숨이 차 병원을 찾았다가 심장 좌우 판막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장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크게 부풀어 올랐고, 이로 인해 불규칙하게 뛰는 부정맥이 왔다. 환자는 이날 수술 전 상당한 양의 수액을 주입받았다. 수술 중 심장이 멎은 뒤 혈액이 굳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18일 고려대 안암병원 수술실에서 의료진이 60대 환자의 심장 수술을 위해 자가 혈액을 모아 수혈하는 셀 세이버 장비를 가동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18일 고려대 안암병원 수술실에서 의료진이 60대환자의 심장 수술을 위해 자가 혈액을 모아 수혈하는 셀 세이버 장비를 가동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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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시작하자 출혈이 계속됐다. 수혈해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그런데 의료진은 수혈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자가수혈기인 ‘셀 세이버(Cell saver)’라는 장비를 활용했다. 수술 도중 흘러나온 피를 모아 원심분리기로 돌려 적혈구·백혈구·혈소판 등의 성분을 분리해 몸에 재주입했다. 혈액 성분이 몸에 들어가 묽어진 혈액을 보완해 줬다. 적혈구(혈액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세포)가 몸에 들어가자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갔다.

수술을 집도한 손호성(흉부외과) 교수는 “일반적인 수술법이라면 혈액 6~10팩(유닛)을 수혈해야 하는데 셀 세이버를 써 수혈량을 1팩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셀 세이버는 수술 중 새는 혈액을 모아 적혈구 등을 분리한 뒤 재주입하는 장비다. [사진 고려대 안암병원]

셀 세이버는 수술 중 새는 혈액을모아 적혈구 등을 분리한 뒤 재주입하는 장비다. [사진 고려대 안암병원]

수혈하지 않거나 최소화하는, 소위 ‘무수혈 수술(최소 수혈)’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큰 수술이든 작은 수술이든 출혈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혈을 해 왔다.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수술=수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무수혈 수술을 하는 곳이 생기고 있다.

자료: 순천향대서울병원, 인제대 서울?상계백병원

자료: 순천향대서울병원, 인제대 서울?상계백병원

고려대를 비롯해 순천향대·인제대백병원 등 전국 20여 개 종합병원이 무수혈 수술을 도입했다. 순천향대서울병원·서울백병원·상계백병원 무수혈센터에서 연간 700여 명이 넘는 환자가 무수혈 수술을 받는다. 이정재 순천향대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종전에는 종교적 이유로 일부 환자가 무수혈 수술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환자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무수혈 수술이 확산하는 이유는 수혈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동안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된 피를 수혈받는 수혈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2013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31세 남성 환자가 수혈을 받았다가 호흡곤란·발열 등의 이상증세를 호소했다. 그래서 수혈된 혈액을 검사했더니 황색포도상구균이 검출됐다.

지난해 말 부산의 한 대형병원에서는 혈액형이 B형인 여성 환자(78)가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던 중 A형 혈액을 잘못 수혈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장기 기능 저하, 혈액 거부반응이 나타나면서 의식을 잃었고 끝내 여러 장기가 망가지면서 숨졌다.

자료: 질병관리본부

자료: 질병관리본부

또 혈액형이 같더라도 남의 피가 몸에 들어오면 면역 거부반응이 생긴다. 수혈받은 혈액을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이물질로 보고 체내 면역세포가 이를 공격하는 것이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의료기관 169곳에서 지난해 3293건의 수혈 관련 면역 거부반응이 발생했다. 발열·두드러기 등 알레르기 증상이 대표적이다. 수혈받은 피가 체내에서 덩어리져 혈관을 막는 것도 면역 거부반응의 일종이다.

생명을 앗아가는 심각한 거부반응도 있다. ‘수혈 의존성 급성 폐 손상’이 그것인데, 최근 5년간 16건이 발생했다.

국제학술지 ‘란셋’에 실린 논문(2011)에 따르면 미국 수술 환자(심장 수술 제외) 22만7425명을 분석했더니 수혈받은 환자는 무수혈 환자보다 두 배가량 사망률이 높았다. 합병증이 발생한 비율도 80% 높았다.

종합병원 20곳 무수혈 수술 … 건보 안 돼

수술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소 수혈이 가능해졌다. 내시경수술과 로봇수술이 확산하고 최소침습(절개) 수술이 증가하면서 최소 절개→출혈량 감소→수혈 최소화로 이어진다.

수혈의 부작용을 우려해 무수혈 수술을 선택하는 환자도 있다. 골육종 환자 김모(13)양은 지난 1월 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2시간30분 걸렸다. 보통 이 정도 수술에는 혈액 6팩을 수혈받는다. 하지만 김양은 수혈받지 않았다. 김양의 어머니 김모(44)씨는 “수혈 과정에서 감염과 면역 거부반응 때문에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수혈 수술을 선택했다”며 “수술을 받고 염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던데 우리 아이는 큰 합병증 없이 항암치료를 잘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김양은 수술 2주 전 병원을 찾아 고용량의 정맥 철분제를 맞았다. 철분은 피를 만드는 재료다. 이를 통해 혈액 중 헤모글로빈 수치를 10.2mg/dL에서 12.5mg/dL로 올렸다. 수술 전에는 지혈제를 투여했다. 김양의 수술을 맡은 고려대 안암병원 정형외과 박종훈 교수는 “수술 부위의 혈액을 빨아내지 않고 열로 지지거나 묶어 출혈량을 줄였다”고 말했다.

무수혈 수술은 호주·미국 등지에서 널리 쓰인다. 이들 나라에선 혈액 가격이 비싼 것도 한 이유다. 물론 무수혈 수술이 좋다고 해서 모든 수술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 등 응급상황이나 심·뇌혈관계 질환, 중증 폐질환으로 산소 공급 능력이 떨어질 때는 수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수혈 수술에 쓰이는 고용량 정맥 철분제(1회 주사에 15만~20만원)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다 내야 한다. 셀 세이버(20만~30만원)도 마찬가지다.

순천향대서울병원 이정재 교수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헌혈 인구가 줄면서 국내 혈액 조달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정부가 암·심장병 등의 수술 질을 평가할 때 수혈량을 평가 잣대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수혈 수술이 만능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대한수혈학회 엄태현(인제대의대 일산백병원 진단검사의학과) 홍보이사는 “무수혈 수술이 무조건 좋고, 수혈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며 “수혈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문제가 있지만 환자의 상황에 맞게 적정하게 수혈하거나 최소한으로 수혈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수혈의 기준
- 혈액 내 헤모글로빈(혈색소) 수치가 7g/dL 이하(정상은 13~14g/dL)일 때

-출혈량이 전체 혈액의 30% 이상일 때

●수혈이 필요한 때
-심·뇌혈관계 질환, 중증 폐질환 수술

-65세 이상 고령자, 6개월 이하 영유아

-과다출혈 부상자나 임산부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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