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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 출구전략 고민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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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1. 2013년 베니그노 아키노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 남중국해 영유권과 관련해 중국을 국제중재재판소(PCA)에 제소했다.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듬해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단독 회담을 못한 나라는 필리핀이 유일했다. 그런 홀대를 하던 중국이 지금은 필리핀을 ‘베프(베스트 프렌드)’로 대접하고 있다. 지난해 집권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남중국해 문제로 인한 대립을 피하고 친중 노선으로 방향을 틀면서부터다. 중국은 농산물 수출 금지 등 필리핀에 대한 보복 조치를 화끈하게 풀었다.

#2. 2012년 일본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국유화 조치로 얼어붙은 중·일 관계가 점진적으로 풀리기 시작하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시 주석은 2014년 APEC 회의 때 ‘손님 대접’이란 명목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회담했다. 끊임없는 비선 접촉과 특사 파견 끝에 마련된 돌파구였다. 이듬해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총무회장이 3000명을 이끌고 방중하자 시 주석이 환영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니카이는 1972년 중·일 수교에 서명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직계다. 양국 관계가 아무리 험악해도 중국은 다나카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흐트러뜨리는 법이 없다. 당시 시 주석의 환대는 중·일 관계를 적정 수준까지 풀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중국 관광객이 일본으로 몰려갔고 반 토막이던 도요타 자동차의 중국 판매도 회복됐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와 관련한 중국의 보복이 언제 풀릴지 모두들 궁금해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바로 풀릴 것이란 기대가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물론 차기 대통령이 사드를 철회하면 필리핀처럼 다시 중국의 베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인가. 중국의 압력에 밀려 국가 안보에 관한 결정을 뒤엎는 걸 국민 여론이 용납하지 않을 것임은 최근 여론조사가 알려준다.

차기 대통령은 사드 배치 이후의 한·중 관계 재설정이란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취임 전 배치를 끝내 줬으면…’ 하는 게 대권주자들의 본심일지 모른다. 지지율 선두인 문재인 후보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드 반대론자와 겹치는 핵심 지지층과 국민 전체 여론 사이에서 그는 운신의 폭이 없다. 어차피 번복하지 않을 (혹은 못할) 것이라면 새 정부 출범 전 배치를 끝내거나 비(非)가역적 수준으로 진행시키는 게 좋다고 본다. 그게 차기 대통령으로 하여금 사드 원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대중 외교에 임할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중국 역시 새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 할 것이다. 결국 중·일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한·중 관계도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풀어 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눈앞의 보복 조치에 어쩔 줄 몰라 할 때가 아니라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출구전략을 고민할 때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