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공부] 사냥 중 낙마한 태종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 실록엔 감추라는 어명까지 적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4.17 02:08

업데이트 2017.04.17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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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선시대 왕실의 사초(史草)처럼 과거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큰별쌤’ 최태성 역사 NIE
왕도 손댈 수 없었던 역사기록
행사 기록한 의궤엔 요강 개수까지
5·18 현장 생생히 남긴 여고생 일기
김종필·오히라 비밀회담 메모 …
현재를 남기는 다양한 기록물로
후세가 더 나은 역사 만들게 해야

지난 2월 최순실(61·구속기소)씨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박영수 특별검사팀 관계자가 안종범(58) 전 청와대 수석의 수첩을 두고 한 발언이다. 청와대의 압수수색 거부 등으로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특검은 올해 초 안 수석의 수첩 39권을 입수했다. 일자와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 그의 수첩은 한때 난관에 부딪혔던 수사에 활력을 주고, 법원에서 증거로도 활용됐다. <중앙일보 2월 18일자 2면, 3월 7일자 10면>

그런데 왜 특검은 안 전 수석의 수첩을 조선 왕실의 사초에 비유했을까. 조선 왕실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한 기록물을 남겼다. 왕의 통치 행위를 담은 ‘실록’, 왕명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이 다룬 사건과 문서를 다룬 ‘승정원일기’, 국왕의 일기인 ‘일성록’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의 기록물엔 사소해 보이는 것들까지 정성스레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의궤’엔 국가적인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는데, 행사를 위해 준비한 요강·대야·걸레 개수까지도 정확히 남겼다.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 사진처럼 생생히 기록돼 있어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역사 자료다. [중앙포토]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 사진처럼 생생히 기록돼 있어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역사 자료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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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꽃인 실록은 편집의 독립성과 기록에 관한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 신뢰도가 높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었을 정도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그는 사냥을 좋아했다.

그런데 사냥하던 태종이 말에서 떨어졌다(태종 4년 2월 8일자 기록). 이를 민망하게 여긴 태종은 주변을 돌아보며 “이 일을 사관(史官)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명을 내린다. 하지만 실록에는 왕의 낙마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태종이 이를 감추라고 명령한 사실까지 고스란히 기록됐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승정원일기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승정원일기

왕의 신하인 사관이 어떻게 왕의 명령까지 거부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태종의 아들 세종 때 실록을 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세종 20년 3월 2일). 세종은 태종의 기록을 열람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의정이었던 황희는 “불가하다”고 고했다. 왕이 기록을 보면 ‘후세 사람들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고, 사관은 기록에 두려움을 느껴 결국 후손이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세종은 결국 실록 열람을 포기했다.

난중일기·열하일기 … 공식 기록 맞먹는 가치

실록은 선대의 평가가 현재와 다르더라도 함부로 삭제하거나 고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조선 14대 왕 선조에겐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따로 있다. 전자는 북인이 집권했을 때, 후자는 인조반정으로 북인을 몰아낸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각각 기록됐다. 때문에 두 실록은 사건·인물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남인인 서애 유성룡에 대해 ‘선조실록’은 “재상의 그릇으로는 부족하다”고 혹평했지만 ‘수정실록’은 “사관이 유성룡을 폄훼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서인의 입장에선 북인의 시각으로 기록된 선조실록을 아예 파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애초의 기록과 수정된 기록을 모두 남겨 후손이 평가할 여지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인 ‘광해군일기’.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던 시기(1608~23)의 역사를 소상히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472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 국보 151호이며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됐다. [중앙포토]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의 일부인 ‘광해군일기’. 광해군이 임금으로 있던 시기(1608~23)의 역사를 소상히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472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했다. 국보 151호이며 1997년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됐다.[중앙포토]

때론 일기와 같은 개인적인 기록도 후손이 역사를 기억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진중에서 작성한 ‘난중일기’, 조선 후기 이문건이 손자 이수봉을 양육한 과정을 기록한 육아일기인 ‘양아록’, 조선 후기 문인 유만주가 1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인 ‘흠영’,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가 대표적이다.

난중일기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결과물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자료다. 전쟁을 직접 겪은 당사자의 기록이라 생생함이 돋보이며, 당시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여러 부문에 대한 측면사와 수군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중앙포토]

난중일기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결과물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자료다. 전쟁을 직접 겪은 당사자의 기록이라생생함이 돋보이며, 당시 정치·경제·사회·군사등 여러 부문에 대한 측면사와 수군의 연구에도움을 준다.[중앙포토]

개인의 일상과 생각을 적은 기록이 쌓이면 공식 기록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다.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생생히 전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2011년 유네스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는데, 해당 기록물 중엔 한 여고생의 일기도 포함됐다. 요즘 우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기는 글, 사진도 후손들에겐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으로 활용될 수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광주민주화운동의 발발과 진압, 이후의 진상 규명과 보상 과정 등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문건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긍정적 역사 뿐 아니라 부정적 과거도 잊지 말아야 할 인류의 소중한 기록임을 상기시켜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중앙포토]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광주민주화운동의 발발과 진압, 이후의 진상규명과 보상 과정 등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있는 문건으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긍정적 역사뿐 아니라 부정적 과거도 잊지 말아야 할 인류의 소중한 기록임을 상기시켜주는 사례”라고평가했다.[중앙포토]

역사를 만든 기록, 기록을 만든 역사

한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기록들이 등장해 통념과 학설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던 중 탑신부에서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됐다. 여기엔 서동요로 친숙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뒤집는 내용이 있다. 발견된 봉안기엔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시주했다’고 적혀 있는데, 미륵사를 백제의 왕비가 된 선화공주가 무왕에 간청해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충돌한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선화공주와 무왕이 진짜 부부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

금제사리봉안기 『삼국유사』에 백제 30대 왕 무왕(武王·재위 600~ 641)과 신라 선화공주가 결혼한 뒤 미륵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다. 2010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절의 유래가 적힌 봉안기가 출토됐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에 의해 미륵사가 창건됐다는 사실이 기록돼있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중앙포토]

금제사리봉안기 『삼국유사』에 백제 30대 왕 무왕(武王·재위600~ 641)과 신라 선화공주가 결혼한 뒤 미륵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다. 2010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절의 유래가 적힌 봉안기가 출토됐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딸에 의해 미륵사가 창건됐다는 사실이 기록돼있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중앙포토]

현대에도 기록은 중요한 제보자가 되고 있다. 1960년대 경제 발전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의 비밀 회담이 있었다. 몇 년 뒤 회담 내용이 담긴 메모가 공개되자 굴욕 외교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기록은 잊혀질 뻔했던 인물·사건을 후손에게 돌려준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 사후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를 당한다. 18년간의 유배 생활 중 정약용은 책 쓰기에 몰두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다. 정약용은 저술에 몰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은 그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실제로 후대 역사가들은 정약용을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언론의 기록, 개인이 남긴 일기·SNS 등을 통해 우리의 삶은 매일 기록되고 있다. 다양한 기록물을 통해 현재가 후세에 기억되고, 역사가 된다. 충실한 기록을 물려줘 후세에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주고, 나아가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돕는 것도 우리의 역할 아닐까.

●새 연재 시작합니다
‘큰별쌤’이란 별명으로도 유명한 최태성 EBS 한국사 강사의 ‘역사 NIE’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 대해 유래와 의미를 역사 속 사례를 통해 되짚어 봅니다. 첫 회는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건 수사에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됐던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수첩을 계기로 역사 속 기록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이번 ‘열공상담소’에서는 ‘만 3세에 뇌 발달이 완성된다’는 일부 사교육업체의 과장 광고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알아봅니다.

최태성 EBS한국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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