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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출신 정상은, 탁구 만리장성 구멍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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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아시아선수권 32강전에서 세계 1위 마룽과 랠리를 벌이고 있는 정상은(위). [사진 ITTF 중계 캡처]

아시아선수권 32강전에서 세계 1위 마룽과 랠리를벌이고 있는 정상은(위). [사진 ITTF 중계 캡처]

지난 14일 아시아탁구선수권 남자 개인 32강전이 열린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의 스포츠 센터. 탁구 최강국 중국의 관중들은 세계 1위 마룽(馬龍·29)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국제탁구연맹(ITTF)은 “마룽의 패배는 이번 대회 가장 큰 뉴스”라고 전했다.

17년 만에 아시아선수권 은메달 #32강서 세계 최강 마룽 3-1 제압 #중국 팬앞에서 ‘중국 자존심’ 꺾어 #“올림픽 등 해볼 만” 한국 희망으로 #옌볜서 태어나 중학생 때 한국국적 #부상·부진 딛고 올해 부활 스매싱

중국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리장성을 무너뜨린 선수는 중국동포 출신 정상은(27·삼성생명)이었다. 정상은은 세계랭킹 1위 마룽을 맞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정확한 드라이브 공격을 성공시킨 끝에 3-1로 승리를 거뒀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인 마룽은 2015년 3월 이후 한 번도 세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탁구계의 ‘철옹성’이다. 공식경기에서 마룽이 중국 선수가 아닌 선수에게 진 건 2012년 4월 런던올림픽 자격 예선에서 니와 고키(일본)에 2-4로 패한 이후 5년 만이었다. 마룽은 “실수가 많았다. 정상은이 경기를 잘 준비하고 나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회 32강전에서 철옹성을 넘은 정상은은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랐다. 16일 열린 준결승에선 니와 고키(13위)에 3-2로 역전승했다. 8강에서 세계 3위 쉬신(許昕·중국)을 꺾었던 니와에게 정상은은 1·2세트를 먼저 내주고 3·4세트를 내리 따내 승부를 마지막 5세트로 몰고 갔다. 5세트에서 정상은은 6-10까지 뒤져 패색이 짙었지만 여기서 내리 5점을 따낸 뒤 듀스 끝에 긴 승부를 마무리지었다. 비록 16일 오후 열린 결승에서 세계 2위 판젠둥(樊振東·중국)에 0-3으로 져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강하게 맞받아치는 드라이브 공격으로 상대를 긴장시켰다. 2000년 김택수 현 남자대표팀 감독 이후 17년 만에 이 대회 은메달을 딴 정상은은 “결승전이 아쉬웠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더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 자치주에서 태어난 정상은은 탁구 선수로 활동하던 아버지 정부원(61)씨를 따라 여섯살 때 처음으로 탁구 라켓을 잡았다. 중국 지역 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그는 2005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 여행사에 다녔던 어머니 김난(59)씨가 한국 국적을 얻으면서 그도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춘기 시절 방황하면서 잠시 탁구를 그만뒀던 그는 2006년 3월 동인천고에 입학해 다시 라켓을 쥐었다. 그리고는 2007년 12월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탁구 사상 처음으로 주니어세계선수권 남자 단식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성인 무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가대표 상비군으로는 자주 뽑혔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에 기여했지만 올림픽에는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정영식(25·미래에셋대우)·이상수(27·국군체육부대) 등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선수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린 것이다. 이철승(45) 삼성생명 감독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정상은은 어깨 부상을 입었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다”고 말했다. 국제 대회에 나서지 못한 그는 세계랭킹에서도 사라졌다.

은퇴 기로에 섰던 정상은에겐 지난 2월 탁구대표팀 선발전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만 해도 정상은은 ‘딱 14등 안에 들어서 상비군에라도 뽑히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선발전에 출전했다. 그런데 전체 4위(18승6패)에 올라 상위 4명만 발탁되는 대표팀에 뽑혔다. 뜻밖에 얻은 기회를 정상은은 놓치지 않았다. 이철승 감독은 “정상은이 대표팀에 뽑힌 뒤 주무기인 드라이브 기술을 가다듬었다.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성격인데 ‘하반기엔 국제 대회에 내보내 달라’고 하더라. 다시 일어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고 말했다.

오른손 셰이크핸드 공격형인 정상은은 내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2020 도쿄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정상은은 “나중에 중국 선수와 다시 만나도 좋은 경기를 할 자신이 있다. 주눅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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