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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등장하는 창극 '흥보씨'의 파격… 숨은 의도는?

중앙일보

입력

창극 '흥보씨'의 피날레 장면. 원작을 해체하고 서양 음악과 춤을 적극 차용한 '흥보씨'는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의 피날레 장면. 원작을 해체하고 서양 음악과 춤을 적극 차용한 '흥보씨'는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사진 국립극장]

화제의 창극 ‘흥보씨’가 막을 내렸다. 5∼16일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한 ‘흥보씨’는 평균 객석 점유율 91%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흥보씨’는 올 시즌 국립극장의 최대 기대작이었다. 당대의 이야기꾼 고선웅이 극본과 연출을 맡고 당대의 소리꾼 이자람이 음악감독으로 결합하면서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동시에 김준수ㆍ유태평양ㆍ최용석 등 국립창극단 소속의 젊은 소리꾼을 대거 주연으로 발탁해 ‘판소리 세대교체’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립창극단은 국립극장 전속 예술단체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은 “초연이라 부족한 점도 보였지만 내년 시즌에는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제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ㆍ심청가ㆍ흥부가ㆍ수궁가ㆍ적벽가)을 창극으로 선보이고 있다. 창극 ‘흥보씨’의 재미와 의미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창극 '흥보씨'는 초연에도 평균 객석 점유율 91%를 기록했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는 초연에도 평균 객석 점유율 91%를 기록했다. [사진 국립극장]

소리꾼과 배우
 흥보가 너무 잘생겼다. ‘판소리계의 아이돌’ 김준수는 행색이 초라해도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소리를 몰라도, 창극에 관심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청춘스타 김준수를 지켜보는 재미만도 쏠쏠했다. ‘잘 생긴 오빠’가 소리도 잘했다!
 흥보 처 이소연도 눈에 띄었다. 김준수의 외모가 빛나면 이소연은 연기가 도드라졌다. 뒷모습만으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소연은 뒤돌아서도 연기를 했다. 이소연의 등에는 한이 서려 있기도, 흥이 배어있기도 했다.

창극 '흥보씨'의 흥보네. 흥보 이준수는 잘 생겼고 흥보 처 이소연은 연기가 돋보였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의 흥보네. 흥보 이준수는 잘 생겼고 흥보 처 이소연은 연기가 돋보였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소리꾼이다. 하나같이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명창이다. 이 명창들이 무대에서 빚어내는 음악극이 창극이다. 하여 창극과 비교되는 서양 장르는 뮤지컬이 아니라 오페라다. 창극에 출연하는 배우가 소리꾼이듯이 오페라 배우도 가수라 부른다. 김준수의 외모와 이소연의 연기가 돋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소리꾼과 배우의 연기를 동일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여느 창극보다 연극적 요소가 두드러진 고선웅 연출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연습실에서 고 연출이 소리꾼에게 부단히 주문한 것도 연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연극배우라면 익숙한 등장과 퇴장, 무대 동선 등에서 소리꾼은 서툰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이번 작품의 안무는 서양무용 출신 지경민이었다. 소리꾼들은 무대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은 물론이고 온갖 해괴망측한(!) 동작도 감당해야 했다. 제비족을 연기한 유태평양의 ‘끈적 댄스’에 일부 관객이 거부감을 나타낸 까닭이다.

창극 '흥보씨'에서 박씨 물고 오는 제비는 없다. 대신 제비족이 등장한다. 판소리 신동 출신 유태평양이 열연했지만 일부 관객은 "제비족이 춤을 너무 못 춘다"고 꼬집었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에서 박씨 물고 오는 제비는 없다. 대신 제비족이 등장한다. 판소리 신동 출신 유태평양이 열연했지만 일부 관객은 "제비족이 춤을 너무 못 춘다"고 꼬집었다. [사진 국립극장]

소리도 쉽지 않았다. 창극 ‘흥보씨’는 판소리 ‘흥보가’의 눈대목(판소리에서 가장 화려하거나 두드러진 장면)을 건사하면서도 음악적 분위기를 비틀었다. 이를테면 전혀 엉뚱한 대목에서 생뚱맞은 인물이 눈대목을 소화했다. 원래는 흥보가 부르는 ‘흑공단타령’을 놀보와 원님이 나눠 부른 장면이 대표적이었다. 흥보와 놀보, 흥보와 제비가 연출한 ‘판소리 배틀’도 흥미로운 시도였고, 흥보네 가족이 합창하는 ‘쟁기질 노래’는 차라리 서양 음악처럼 들렸다. 악사 9명이 18개 악기를 연주했는데, 신시사이저를 비롯한 서양 악기도 여럿 활용됐다. 이자람 음악감독과 고선웅 연출의 첫 만남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는 그만큼 소리꾼에게 고단한 작업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베테랑 소리꾼의 연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여든세 살 나이에도 우정출연을 자청한 각설이 역의 윤충일 선생, 단역도 가리지 않은 국립창극단 수석단원 윤석안, 뺑덕ㆍ향단ㆍ토끼에 이어 놀보 처까지 감초 역 전문으로 굳힌 서정금 등 내로라하는 소리꾼의 성의 있는 연기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중견 소리꾼의 연기는, 눈부신 이력을 모르면 소리도 잘하는 배우라고 착각할 만한 것이었다.
 판소리의 ‘판’에서 ‘판을 깔다’는 말이 나왔다. ‘한 판 신나게 놀아볼까?’의 판도 이 판이다. 창극 ‘흥보씨’는 소리꾼들이 제대로 논 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창(唱)을 몰라도 재미있었다.

우리 소리에 서양 음악과 춤 결합한 파격 창극 '흥보씨' #고선웅 연출 이자람 음악감독의 성공적인 첫 만남 #외계인과 제비족 등장하고 흥보는 예수로 부활하고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묻는 묵직한 주제의식도

창극 '흥보씨'의 해괴망측한 포스터. 예수처럼 가시관을 쓴 흥보가 마술공처럼 생긴 박을 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UFO가 흥보 머리에 영광을 내리듯 광선을 내리쬔다. 왼쪽에는 장미를 문 제비가 날아다닌다. 이 포스터에 창극 '흥보씨'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의 해괴망측한 포스터. 예수처럼 가시관을 쓴 흥보가 마술공처럼 생긴 박을 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UFO가 흥보 머리에 영광을 내리듯 광선을 내리쬔다. 왼쪽에는 장미를 문 제비가 날아다닌다. 이 포스터에 창극 '흥보씨'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진 국립극장]

흥부가와 흥보씨
 이제 드라마를 볼 차례다. ‘홍보씨’는 시종 웃긴다. 웃다 보면 끝난다. 고선웅 특유의 말장난도 여전하지만, 이번엔 캐릭터부터 만화적이다. 특히 외계인 승려와 제비족 캐릭터는 고 연출의 키치적 성향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서사의 개연성? 글쎄다.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었더니 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나왔다는 원작에도 개연성 따위는 없었다.

창극 '흥보씨'는 파격이 이어진다. 흥보에게 가르침을 주는 승려가 외계인이다. 우주의 이치를 전달하기 위해서란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는 파격이 이어진다. 흥보에게 가르침을 주는 승려가 외계인이다. 우주의 이치를 전달하기 위해서란다. [사진 국립극장]

 드라마는 여느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출생의 비밀에서 시작한다. 흥보는 찔레나무 아래에서 주워왔고 놀보는 어머니 황씨의 외도로 태어났다. 왜 고 연출은 굳이 전사(前史)에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놀보가 흥보를 쫓아내는 장면에서 의문이 풀린다. 형제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다. 놀보는 연씨 집안의 피를 절반은 물려받았지만, 흥보는 애당초 연씨 핏줄이 아니었다.

패러디도 난무했다. 무엇보다 종교적 아이콘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흥보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곰처럼 흥보네는 삼칠일간 나물만 먹고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열두 제자로 변신한 흥보네 가족은 경건한 목소리로 합창했다. “내게 강 같은 화평… 비워야 하리 텅텅텅 그때서야 울리리 텅텅텅.” 예수로 부활한 흥보는 놀보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의외로 묵직한 고민을 담고 있다. 원작에서 흥보는 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기적 덕분에 행복해진다. 그럼 기적이 없어도 흥보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의 조건도 기껏해야 금은보화, 즉 물질적 풍요일 뿐인가. 다시 보니 ‘흥부가’는 섬뜩한 이야기였다. 로또 당첨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착한 사람은 평생 행복할 수 없다는 저주였다. 

 창극 ‘흥보씨’가 비튼 건 외계인과 제비족 따위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흥부가’가 교묘히 숨긴 절망의 삶이었다. 그래서 흥보는 거듭나야 했다. 돈벼락을 맞는 어리바리 도련님이 아니라 무소유 철학을 전파하는 성인이 되어야 했다. 창극 ‘흥보씨’는 외려 급진적인 이야기였다. 2막을 지배한 후렴구 ‘비워야 하리 텅텅텅’은 예수와 부처의 말씀을 다 합친 우주의 가르침이었다.  

창극 '흥보씨'에서 흥보는 성인으로 거듭난다. 부처 같기도 하고 예수 같기도 하다. [사진 국립극장]

창극 '흥보씨'에서 흥보는 성인으로 거듭난다. 부처 같기도 하고 예수 같기도 하다. [사진 국립극장]

 김성녀 예술감독도 인정했듯이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는 못했다. 초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창 패럴림픽 개ㆍ폐막식 총연출까지 맡은 고선웅 연출의 빡빡한 일정 탓이기도 했다. 그래도 5일 첫 공연보다는 12일 공연이 훨씬 짜임새가 있었다. 첫날 공연이 어수선했다는 지적에 몇몇 장면을 손보고 들어낸 결과였다.

창극은 근대에 발생한 장르다. 극장이 들어서면서 1인 예술인 판소리를 다수의 소리꾼이 연기하는 극장용 음악극도 탄생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창극의 소재와 주제, 나아가 형식까지 확정된 법칙은 없다. 고선웅 연출과 이자람 음악감독, 그리고 국립창극단이 판소리 ‘흥보가’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에 도전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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