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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명이 즐기는 두뇌 무술, 조대원은 ‘북한판 이세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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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호 23면

[평양탐구생활] 바둑 열기

평양바둑원이 2015년 7월 리모델링하면서 2층으로 새롭게 개원한 뒤 바둑의 기초기술과 기법을 배우려는 어린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사진 통일신보]

평양바둑원이 2015년 7월 리모델링하면서 2층으로 새롭게 개원한 뒤 바둑의 기초기술과 기법을 배우려는 어린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사진 통일신보]

흰돌과 검은돌의 진검승부인 바둑이 평양에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지난해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세기적인 바둑 대결은 북한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월간지 ‘조국’은 지난 3월호에서 ‘평양바둑원의 바둑 열기’라는 제목으로 평양에서 부는 바둑 열풍을 소개했다. ‘조국’은 고승철 평양바둑원장의 인터뷰를 통해 “평양바둑원에 바둑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한 해가 다르게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평양바둑원은 2000년 4월 전문 바둑 선수와 인재양성, 바둑의 대중적 보급을 위해 개원했으며 2015년 리모델링을 했다. 현재 함경북도·양강도·평안북도·평안남도·강원도·남포시 등에 분원을 두고 있다.


북한에서 바둑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다양하다. 특히 4~5세 어린이를 포함한 영재 바둑이 몇 년 전부터 붐을 일으키고 있다. ‘조국’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서흥동에 사는 장영숙(32)씨를 만나 다섯 살 아들에게 바둑을 배우게 한 이유를 물어봤다. 장씨는 “바둑은 어린이들의 지능계발에 매우 좋은 지능 체육종목”이라며 “장차 우리 아들이 바둑으로 조국을 빛내면 더 좋겠다”고 밝혔다.

아마7단 조대원 세계 대회 1위 #여자 대회 우승 함은경도 ‘신동’ #김정일 89년 민속놀이로 규정 #바둑소조 설립 지시하며 관심 #꿈나무는 중국 유학 보내줘 #프로 비슷한 완전선수제 도입

유치원 교양원들도 바둑을 배우고 있다. 북한은 유치원 교사를 교양원이라고 부른다. ‘조국’은 평양시 중구역 교구유치원에 근무한 한설향(25) 교양원을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 한씨는 “지능계발에 매우 좋은 바둑을 원아들에게 가르쳐 주려면 우선 교양원인 제 바둑수준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평양바둑원을 찾는다”고 밝혔다. 평양바둑원은 직장인들에게도 인기 있다. 내각 농업성 부원 이원용(48)씨는 “바둑을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사업에서도 능률이 난다. 평양바둑원 지도교원들의 수준이 아주 높아 자주 찾아온다”고 말했다고 ‘조국’은 소개했다.

한때 착취계급의 오락으로 취급

1 전국어린이바둑대회가 태권도전당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실력을 겨루고 있다.

1 전국어린이바둑대회가 태권도전당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실력을 겨루고 있다.

북한은 바둑을 한때 착취 계급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유희오락으로 취급했다. 이를 바로 잡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9년 8월 바둑을 민속놀이로 규정하면서부터다. 북한은 김정일의 뜻에 따라 그해 9월 조선바둑협회를 창립했다. 조선바둑협회는 창립 당시 정무원 체육지도위원회(현재 내각 체육성)에 소속됐다. 두뇌운동을 하는 바둑을 체육의 한 분야로 간주한 것이다.  북한은 바둑을 ‘두뇌격술’이나 ‘두뇌무술’로 생각한다. 90년대 이후 조선무도연맹에 편입되면서 조선태권도위원회가 관장해 현재에 이르게 됐다. 김정일이 자금 사정이 좋은 조선태권도위원회가 맡아서 바둑을 양성해 보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통일부가 발행한 ‘2017 북한주요기관·단체 인명록’에도 조선바둑협회는 체육부문에 포함돼 있다.

북한은 90년부터 전국바둑대회를, 94년부터 전국소년바둑대회를 개최해 유망주를 키우고 있다. 아울러 김정일이 92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각 지역 학생소년궁전에 바둑소조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김정일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은 92년 10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제4회 세계여자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서 최은아 선수가 8위에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알려졌다. 북한은 바둑 기사를 호칭할 때 운동 선수처럼 ‘바둑 선수’라고 부른다. 북한은 이에 앞서 91년 5월 국제바둑연맹에 가입했으며 같은 해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부터 출전했다.

바둑소조에서 재능을 보인 꿈나무들은 중국에 유학도 보내 준다. 최은아가 그런 경우다. 거꾸로 바둑 엘리트 양성을 위해 중국에서 프로 사범을 초청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중국 프로 기사인 왕예후이는 평양에서 북한 정예팀을 가르쳤다.

각종 체육대회의 정식종목 채택

2 평양 시민들이 자녀들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조선의 오늘]

2 평양 시민들이 자녀들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조선의 오늘]

북한은 바둑 활성화를 위해 97년부터 백두산상 체육경기대회를 비롯한 각종 체육대회에 바둑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했고 2014년부터 전국바둑애호가경기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인트라넷(조직내부 네트워크)을 통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바둑 경기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로 바둑 인구는 조선바둑협회가 설립할 당시 5000명에서 90년대 중반에 1만여 명으로 늘었다가 현재 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울러 아마 6~7단 실력을 갖춘 젊은 바둑 선수들은 10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선수는 조대원(28)이다.

아마 7단인 조대원은 2005년 5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당시 조대원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한국의 서중휘 아마 7단을 4회전에서 누르는 등 선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국의 후위칭(胡煜淸) 아마 7단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조대원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이창호 9단의 바둑을 좋아하며 북한 바둑계의 1인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조대원은 그 이후 2008년 제1회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즈 우승, 2013년 상려컵 항저우(杭州)국제도시바둑경기대회에서 북한 선수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북한판 이세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대원에 이어 ‘바둑 신동’으로 평가 받는 사람은 함은경(17) 선수다. 그는 지난해 10월 상려컵 항저우국제도시바둑경기대회 여자개인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함 선수를 조련시킨 사람은 평양바둑원 임현철 기술부원장이다. ‘조국’은 “임 부원장이 다섯 살에 바둑의 세계에 들어선 함 선수에게 올바른 체육정신을 심어주며 기초를 다졌던 초반 2년간의 노력이 오늘의 결실을 맺게 한 튼튼한 뿌리가 됐다”고 소개했다.

북한은 프로제도는 없지만 95년부터 한국의 프로 기사와 비슷한 완전선수제(한국의 전문기사제)를 도입했다. 완전선수들의 바둑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 선수는 북한이 한국을 능가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바둑 영재가 되고 싶은 유치원생이 평양바둑원에 들어가려면 유치원 교양원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부모들이 교양원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유치원은 추천한 원아를 평양시 인민위원회 교육 담당부서로 보내 평양바둑원에서 실시하는 소정의 테스트를 받게 한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면 평양바둑원에 입원할 수 있다. 바둑은 정규수업이 아니라 과외활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재능이 보이는 유치원생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평양시 대동강철제일용품공장에서 근무한 탈북민 장나예씨는 “평양바둑원 등에서 영재 교육을 시키려는 부모들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며 영재교육은 부모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평양바둑원에서 교육은 공짜이지만 바둑 영재 부모 가운데 자기 자식을 더 잘 봐달라며 지도교원들에게 뇌물을 건네는 것은 다반사다. 장씨는 “돈이 없으면 영재 교육을 시킬 수 없다”며 “영재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출세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서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게다가 북한에서 바둑 선수는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라고 한다. 현재까지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더라도 체육 선수들처럼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도 없다. 하지만 바둑 선수로 두각을 보이면 군대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복무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바둑을 계속 둘 수 있는 곳에 배치되기도 한다. 탈북민 엄현숙 서울통일교육센터 전임강사는 “바둑을 잘 해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바둑 영재로 크면 감사할 뿐더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평생 할 수 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괜찮은 직업”이라고 주장했다. 엄씨는 “특히 바둑은 아직 영재가 많지 않은 분야라 특출난 재능을 보이면 전도유망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상대방의 급소가 나의 급소’ 강조

‘바둑신동’ 이수연양(왼쪽 넷째)이 친구들에게 바둑 기초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바둑신동’ 이수연양(왼쪽 넷째)이 친구들에게 바둑 기초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바둑의 별미는 인생을 담은 바둑 격언들이다. 세상살이가 복잡무쌍해 보이지만 한 판 바둑과 비슷한 데가 많다. 북한 바둑 선수도 마찬가지다. 바둑 교육을 받을 때 바둑 격언들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바둑 격언들에는 ‘상대방의 급소는 나의 급소’ ‘장고하면 악수 나온다’ ‘참아 두면 기회가 온다’ 등 한국 기사들이 새겨 듣는 내용들과 비슷한다.

이 가운데 평양바둑원의 지도교원들은 ‘상대방의 급소는 나의 급소’를 특히 강조한다고 한다. 급소는 서로 있기 때문에 먼저 상대방의 급소를 찾는 눈을 갖는 것이 승패의 열쇠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은 바둑을 체육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스포츠맨십처럼 그에 걸맞는 도리도 강조한다. 바둑에는 룰이 있다. 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둑이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결국 사소한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바둑을 배울 때는 어디서든 예절을 먼저 가르친다. 머리로 하는 게임이라 지고 나면 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유교적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여전히 남아 있어 이를 바둑 예절에 적용하고 있다. ‘조국’은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시작한 지 연한이 오래되고 수가 높으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에 대한 예절을 깍듯이 가르치며 대국이 끝나면 ‘정말 수가 높으십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한 수 더 가르쳐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도록 한다”고 보도했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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