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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발이 저린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7호 34면

상식사전

기술 표준원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발 사이즈는 270㎜, 여자는 235㎜다. 여자 남자 모두 과거에 비해 체형이 커지면서 발 사이즈도 커졌는데, 남자보다 여자의 변화폭이 더 크다고 한다.

그여자의 사전길이뿐 아니라 발등도 높아 한마디로 도둑발 크기에 적당하다. 그래서 여자는 발벗고 나서는 장소나 일 모두 어렸을 때부터 싫어했다. 하지만 예쁜 유리구두가 맞는 신데렐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오랜 좌절의 시간 끝에 하이힐을 깔끔하게 포기하게 되면서부터 그것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내 발은 컸다. 아마 초등학생 시절인 1970년대부터 245㎜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도 조금씩 더 길어졌다. 발이 크면 도둑발이라고들 불렀다. 도둑과 발은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무튼 나는 여자 도둑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괜히 뭔가 딱히 훔친 것도 없는데 죄책감을 가져야 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여자가 보기 흉하게 왜 그렇게 발이 크냐”며 혀를 쯧쯧 찰 때마다 발가락을 오무려 봤지만 별 수 없이 주눅이 들었다.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나는 일찌감치 내 발을 사랑하지 않았다. 신데렐라 동화에서 그 예쁜 유리구두에 작고 날씬한 발이 쏙 들어가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내 이 큰 구두를 어디 가서 흘리고 다녀도 그 크기에 놀라 어떤 남자라도 발 큰 여자 주인을 찾고 싶어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발만 큰 게 아니라 키도 컸다. 시골에는 키 큰 여학생이 드물었고 학교 다닐 땐 늘 교실의 가장 뒷줄에 앉았다. 키도 크고 비쩍 마른 내가 길을 걸어가면 왠지 마른 나뭇가지가 휘영청 움직이는 것 같아 늘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여 땅을 보며 걸었다. 운동화를 주로 신던 어린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니 친구들이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나도 신고 싶어 구두 가게에 갔더니 발은 더 자랐고 심지어 발등까지 뚱뚱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구두를 신어도 길이도 맞지 않고 소복하게 솟아오른 발등이 돋보였다. 그래도 여대생이 됐는데 구두는 신어 봐야하지 않나 싶어 구두를 맞췄다. 도둑발 여자의 자격지심 때문에 내 발 크기보다 5㎜ 이상 적게 만들어 달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그 작은 신발을 신고 돌아다닐 때면 정말 도둑도 아닌데 제 발이 저려왔다. 나는 내 발이 이 시대에 맞지 않게 너무 큰 것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나는 구두 가게에 들어가 예쁜 게 눈에 띄면 척척 사 신고 나서는 친구들이 늘 신데렐라처럼 부러웠다. 매번 구두를 큰 사이즈로 맞추고 며칠 있다 찾으러 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구두를 사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게 됐다.

발과 관련된 일에는 늘 위축이 됐다. 내 주위의 일에 ‘발벗고’ 나서게 되지 않으며, ‘발 디딜 틈’ 없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고, ‘발 넓게’ 다른 사람을 챙기는 마당발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내 큰 발 때문에 삶의 반경이 최소 몇 킬로미터는 줄어든 것 같다.

도둑발에 대한 자괴감을 떨치게 된 건 발레리나 김인희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다. 부부 발레리나로 민간 발레단을 힘들게 키우면서 주위에 봉사도 많이 한 이 분의 발은 무려 260㎜. 나보다 나이도 몇 살 더 많았는데, 그 시절에 그 발 크기라면 정말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분은 그 큰 발 덕분에 아름다운 발레를 평생 했고, 당당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나서 주위를 돌아보니 이제는 젊은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키도 크고 발 역시 큰 사람이 많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해외 직구 쇼핑 시대가 열리면서 얼마든지 큰 신발을 맘껏 사 신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내 발은 시대에 맞는 크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꼭 하이힐을 신지 않아도 스니커즈를 신고 멋쟁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도 딱 하나 ‘발벗고’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발 큰 여자들을 위한 권익 신장 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구두 제품들의 최대 사이즈를 지금보다 최소 1㎝는 늘리는 일이다. 그 사이에 내 발은 더 컸는데 인터넷에도 245나 250㎜까지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몇 번 무리해서 사 신고 돌아다니다가 옛날 여성들이 했다는 전족의 아픔을 뼈저리게, 아니 발저리게 느꼈다.

그동안 작은 신발에 우겨 넣고 다니느라 티눈이 몇 번이고 났다가 사라진 새끼 발가락이 달린 내 발을 들여다 본다. 내 큰 발아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 널 미워하지 않으마. 그래, 신데렐라도 될 수 없고 하이힐도 신을 수 없지만, 발 큰 게 죄는 아니야. 당당하게 말하자. 저 260 신는 여자에요. ●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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