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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악마의 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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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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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흩날린다. 도쿄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만개했던 꽃송이들도 봄바람에 진다. 초록 잎이 돋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일곱 빛깔 무지개 꽃들을 한몸에 품은 벚나무가 세상 어딘가에 있지는 않을까. 오사카성 매림(梅林)의 일부 매화나무가 흰색·분홍색·붉은색 꽃을 동시에 피우는 것을 보면 가능성을 부정하긴 어렵다.

문제는 무지개 벚꽃의 존재 여부를 놓고 의견이 나뉠 경우 입증 방법이다. 양쪽 모두 쉽지 않지만 ‘있다’는 쪽은 단 한 그루라도 무지개 나무를 찾으면 성공이다. 자료를 살피고 열심히 발품을 팔다 보면 운 좋게 발견할 수도 있다. 반면 ‘없다’는 쪽은 완벽한 증명이 어렵다. 벚나무를 전부 확인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깝다.

이처럼 어떤 사실이나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입증을 고대 로마법은 ‘악마의 증명’이라고 불렀다. ‘없다’는 증명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 입증 책임을 부여했다. 논리적 오류로 인식된 ‘악마의 증명’은 결백을 주장하거나 혐의를 부인할 때 방패막이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아키에(昭惠) 스캔들’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악마의 증명’ 카드를 꺼내들었다. 극우 성향 오사카 모리토모(森友) 학원의 국유지 헐값 매입 과정에 본인 부부가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기부금 100만 엔(약 1000만원)도 건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다. 관련성이 드러날 경우 총리직까지 사퇴하겠다고 이미 공언한 벼랑 끝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승부수다.

아베는 참의원에서 “기부를 아내에게 맡기지 않는다. 영수증이 없고 동행한 비서의 말을 들어봐도 기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돈을 건네지 않았다는 증명은 ‘악마의 증명’인 만큼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가고이케 야스노리(籠池泰典) 모리토모 이사장은 국회 증인심문에 출석해 “아키에 여사와 둘만 있는 상태에서 총리 기부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증인이나 증거를 들이대지는 못했다.

스캔들에 휘말린 일본 정치인들에게 ‘악마의 증명’은 ‘잡아떼기용’ 단골 카드다. 1993년 운송업체 사가와규빈(佐川急便) 뇌물사건의 증인으로 중의원에 소환됐던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는 “금품을 받지 않았다. 의혹에 관련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악마의 증명’이다. 어렵다”고 빠져나갔다. 96년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당시 자민당 간사장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정치적 모략’으로 몰아붙였다. 자민당 의원들은 ‘악마의 증명’ 논리로 가토를 적극 엄호했다.

아베의 승부수는 통했다. 정치적 공방이 한풀 꺾였다. 총리 부부의 관여를 입증해야 할 가고이케 이사장이 반격에 나서지 못하면서 야당의 공세도 힘을 잃었다. 모리토모 ‘아베 신조 기념 초등학교’ 명예교장까지 맡았던 아키에 여사는 침묵하고 있다. 진실 규명의 책임은 검찰로 넘어갔다. 수사에 나선 오사카지검 특수부의 창이 ‘악마의 증명’ 방패를 뚫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