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부국 베네수엘라의 비극] 포퓰리즘 득세에 경제와 민주주의 모두 붕괴

중앙일보

입력 2017.04.15 00:02

남미의 정치적 풍토병 포퓰리즘의 비극 보여준 사례 … 국민 평균 체중 줄 만큼 경제 악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한 상인이 돈의 무게를 재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경제난으로 화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돈의 액수 대신 무게로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이 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한 상인이 돈의 무게를 재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경제난으로 화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돈의 액수 대신 무게로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이 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포퓰리즘으로 흥청망청하던 남미 산유국 베네수엘라가 신음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경제가 파산 지경에 이르면서 국민은 식량과 생필품을 국내에서 제대로 구하지 못해 이를 구입하려 국경을 넘고 있다.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1999년 우고 차베스의 포퓰리즘 정권이 들어서면서 석유산업을 국영화하고 여기서 나온 돈을 무상복지에 돌렸다. 경제 성장을 위한 투자가 아닌 퍼주기식 복지에 국가 자원을 무제한 투입한 셈이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10% 수준으로 경제가 얼어붙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뒤따랐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정부가 사회주의식 가격 통제에 들어가자 당연히 공급이 줄었다. 이로 인해 식량과 생필품은 바닥이 났고 식량이 부족해 국민의 체중이 줄어드는 현상까지 생기고 있다. 국민은 이런 현상을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 ‘마두로 다이어트’로 부르고 있다.

거기에 민주주의 체제까지 압살하려는 집권 포퓰리즘 세력의 정치 음모까지 겹치면서 국가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베네수엘라 의회는 2015년 12월 총선으로 야당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자 친정권 성향의 대법원이 지난 3월 30일 별도로 지정한 기관이나 산하 헌법위원회가 의회의 입법권한을 대행하게 한다는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야권이 장악한 의회가 법률안 부결권을 행사해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자 친정부 성향의 사법부가 의회의 입법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야권은 이를 두고 독재를 위한 쿠데타라며 반발하고 있다. 사법부가 쿠데타를 벌인 셈이다.

이 사건은 삼권분립이나 민주주의 원칙, 선출된 권력이 입법부를 구성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네 편, 내 편만 생각하는 포퓰리즘 정권의 사고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대법원은 법으로 권력을 견제하기는커녕 그 자체로 권력의 일부가 된 셈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통치 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권력 유지만을 목표로 달릴 때 국가와 국민이 어떤 불행을 겪을 수 있는지를 생생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 결정 뒤 당연히 여론이 들끓고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이를 무효화하겠다고 밝혔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포퓰리즘 정권이 어리석은 것이고 예상하고도 찔러본 것이라면 만용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두고 포퓰리즘이 독재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거나 정치인들의 민주주의 무시와 권력 욕심이 과도할 때 포퓰리즘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 역사적 교훈이다. 아무리 자원이 많아도 장기적인 국가발전 전망이나 국민 행복에 대한 절실하고 정교한 고민이 없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베네수엘라 만큼 잘 보여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때 남미 좌파의 맹주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 사진:중앙포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 사진:중앙포토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나라가 무너질 수 있는가. 사실 베네수엘라는 오랫동안 남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통했다. 우선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서쪽은 만년설이 덮인 안데스 산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마존 정글이 풍부한 산소와 물을 공급해준다. 농업에도 안성맞춤인 토질과 기후다.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고 자연만 덩그러니 있는 시골 국가도 아니다.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도시화가 잘 진행된 국가의 하나다.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무엇보다 석유 매장량이 세계적인 수준인데다 질 좋은 석탄, 철광석, 보크사이트에 금광도 수두룩하다. 다이아몬드도 나온다. 그럼에도 아직 수많은 국민이 가난 속에 산다. 수도 카라카스 주변의 가파른 언덕을 포함한 누추한 마을에서 힘들에 사는 국민이 적지 않다.

이 가난한 민중은 베네수엘라 정치의 핵심 변수다. 1999년 집권해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4년간 집권했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자신을 ‘빈민의 챔피언’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상대로 포퓰리즘 정치를 펼쳤다. 그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뒤 여기서 나오는 수십~수백억 달러의 오일 머니를 국가 미래를 위한 경제개발 대신 빈민의 표를 얻기 위한 사회개발 프로그램에 쏟아 부었다. 포퓰리즘의 원조다. 석유는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GDP)의 40% 가까이 차지한다. 수출의 80~90%, 정부 수입의 절반 이상이 석유에서 나온다. 베네수엘라 최대 산업인 셈이다. 번영의 밑천이 될 수 있었던 석유는 차베스에 의해 포퓰리즘 정권의 정치적 자산으로 변했다. 차베스는 오일 달러를 국내 복지 프로그램에 퍼부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밀어붙였다.

또한 차베스는 석유를 바탕으로 남미 국제정치를 한때 주도했다. 쿠바를 비롯한 남미 좌파 국가의 지원에도 사용했다. 쿠바에는 석유를 주고 의사를 지원받았다. 무상 의료를 유지할 의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일 달러로 미국 뉴욕의 빈민에게 난방연료를 지원하는 황당한 일도 벌였다. 영국 런던에도 빈민 연료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제국주의 국가보다 자신의 포퓰리즘 국가가 우월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국민의 것이어야 할 자국의 석유자원을 마구 사용한 것이다. 소중한 국가의 천연자원을 국민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 않고 퍼주기 복지와 정권 홍보에 소모해버렸다. 이에 따라 상당수 베네수엘라 국민은 국가가 주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해졌다. 일을 하거나 창업에 나설 필요가 별로 없었다. 이를 두고 여러 나라의 좌파는 ‘연대경제의 실험’이라며 칭송했다.

차베스가 세상을 떠난 뒤 뒤를 이은 후계자 마두로는 저유가 상황에서 닥친 국내 경제난과 싸우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난은 육안으로 식별 가능하다. 과거 소련 같은 실패한 중앙계획경제 체제 아래에서 있었던 극심한 생필품 부족과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그것이다. 빈민들이 쿠폰을 들고 생필품을 공짜로,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살 수 있던 슈퍼마켓의 진열대는 텅 비어있다. 국민은 굶고 있다. 생필품과 식량을 구하러 이웃나라로 가는 국민이 장사진을 이뤘다. 인플레가 계속되고 돈 가치가 떨어지자 길거리에 돈을 쌓아둬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현재 대통령인 마두로는 버스기사로 일하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차베스의 좌파 포퓰리즘 정권에서 외교장관을 지낸 그는 2013년 차베스가 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후계자로 지명됐고 곧 이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두로는 차베스 사후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59%포인트, 30만 표 차이의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뒀다. 차베스 추모 표를 감안하면 정치적인 패배나 다름없다. 애초에 리더십이 약했던 것이다. 그는 허약한 리더십과 모자란 능력을 철권통치로 메우려 했다. 포퓰리즘은 포기하지 않았다. 허약한 정권의 마지막 생존 장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다.

마두로 치하에서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경제는 물론 치안도 붕괴했다. 국민은 그에게 등을 돌려 2015년 총선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야권연대 민주연합회(MUD)에 표를 몰아줬다. 이렇게 의회권력은 야당으로 넘어갔지만 마두로는 협치를 하기는커녕 야당 말살 정책만 계속하고 있다. 포퓰리즘 정권은 경제는 무능, 정치는 국민과 민주주의 배신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포퓰리즘이 자원 부국을 파국으로 이끌고 있다.

비극의 씨앗 뿌린 차베스의 포퓰리즘
지난 3월 30일(현지시간) 훌리오 보르게스 베네수엘라 국회의장(가운데)이 삼권분립 원칙을 깨뜨린 대법원 판결문을 찢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 등이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렸다. / 사진:중앙포토

지난 3월 30일(현지시간) 훌리오 보르게스 베네수엘라 국회의장(가운데)이 삼권분립 원칙을 깨뜨린 대법원 판결문을 찢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 등이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렸다. / 사진:중앙포토

베네수엘라 포퓰리즘의 기원은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1954~2013)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다 실패한 그는 1999년부터 대선에 4차례나 당선했다. 3선 금지 헌법을 개헌하기까지 하면서 정권의 수명을 늘렸다. 이렇게 14년간 집권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좌파적 변혁을 이루고 남미 좌파연대의 맹주로 군림했다. 하지만 포퓰리스트로서 국가자원을 편중되게 사용하면서 오늘과 같은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내부적으로는 반대파를 탄압하는 철권통치를 계속했다. 혼란스러운 중남미 세계에서 국내외에 뚜렷하게 기억되는 정책을 편 것만은 분명하지만 포퓰리즘과 독재의 나쁜 전례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차베스가 벌인 일련의 정책과 이념은 스페인어로 ‘차비스모’, 즉 차베스주의로 불린다. 차비스모의 핵심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얻은 수입을 바탕으로 국내적으로는 경제적 평등을, 국제적으론 반미 좌파연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차비스모는 ‘차비스타(차베스 지지자들)’에 의해 ‘21세기 사회주의’로도 불렸다. 한때 무너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를 대신 또는 대체할 수 있는 체제로 주목받기도 했다. 차비스모는 획기적인 정책이라는 칭송과 포퓰리즘 독재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금 보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혼란이 너무도 잘 말해준다. 실패한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에 자원을 앞세운 포퓰리즘을 더한 기묘한 형식의 차비스모는 비극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지독한 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으로 베네수엘라가 혼란에 빠진 20016년이 차비스모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보여준 한해라면, 2017년은 비민주성과 독재적 성격, 즉 정치적 민낯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콜롬비아에서 생필품을 사기 위해 국경 도시 타치라의 시몬 볼리바르 다리 인근에 모여 있다.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콜롬비아에서 생필품을 사기 위해 국경 도시 타치라의 시몬 볼리바르 다리 인근에 모여 있다.

그렇다면 이런 차비스모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영국 BBC방송과 가디언,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차베스는 생전에 중남미의 여러 혁명 지도자들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언급한 스승 리스트는 중남미 혁명의 역사나 다름없다. 중남미 혁명의 전통이 정신적 지주를, 석유산업에서 얻은 막대한 자금이 물질적 바탕이 된 게 차비스모인 셈이다. 차비스모를 이루게 한 남미혁명의 역사와 인물을 살펴보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

중남미 혁명의 여러 선구자 가운데 차베스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남미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1783~1830)다.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베네수엘라·콜롬비아(당시 파나마도 포함)·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 6개국의 독립에 기여했다. 이 나라들은 절대왕정국가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공화국을 수립했다. 남미혁명의 시작이다. 베네수엘라의 중산층 출신인 볼리바르는 젊은 시절 당시 유럽과 그 식민지의 중산층 자제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던 ‘그랜드 투어’를 했다. 1805년엔 로마의 아벤타인 언덕에 올라 일생을 자유에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이곳은 기원전 494년 로마의 평민들이 귀족계급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도시를 세운 곳으로 이후 계몽주의자와 빈식민주의자들에게 독립과 평등, 반봉건의 상징이 됐다.

볼리바르는 혁명가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그리고 왕정을 비롯한 봉건체제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더 나아가 신분제를 철폐하고 모든 인종과 계층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꿈꿨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와 몽테스키 외의 영향이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혁명의 옹호자에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참관하면서 실망하기도 했다. 당시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존재는 유럽의 전제국가에 자극이 됐다. 자유, 평등, 박애와 헌법, 인권, 법치 등은 프랑스 혁명의 수출품이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는 독립운동의 결정적인 기회를 얻었다. 귀국한 볼리바르는 1810년 용병과 주민을 모아 봉기했으며 수십 년에 걸쳐 남미 각지를 해방시켰다.

차베스가 존경한 혁명가들
베네수엘라에 포퓰리즘 비극의 씨앗을 뿌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그가 가장 존경한 볼리바르. / 사진:중앙포토

베네수엘라에 포퓰리즘 비극의 씨앗을 뿌린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그가 가장 존경한 볼리바르. / 사진:중앙포토

차베스는 이런 볼리바르를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1999년 나라 이름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꾸고 그의 정신을 계승한 볼리바르주의를 국정 지표로 삼았다. 볼리바르주의는 외치에선 남미의 경제적·정치적 자주를 추구했고 이는 반미·반 서방으로 이어졌다. 내정에선 무상복지 정책이 핵심이었다. 차베스는 외국 자본을 내쫓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그 수입으로 빈곤층에 의료·교육·식료품 등을 무상 제공했다.

일부 효과도 있었다. 유엔 라틴아메리카 위원회에 따르면 2002년 48.6%에 이르던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2011년 29.5%로 떨어졌다. 하지만 국유화와 무상분배 정책으로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서 물가와 실업률이 치솟았다. 산업 진흥과 장기 투자 없이 오일 달러를 복지에 쏟아부은 탓에 정치적으로는 지지자 확보에 성공했지만 나라 경제는 엉망이 됐다. ‘연대 경제’라는 이름의 이 정책은 또 하나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비난받는다.

차베스는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풀뿌리 민주주의 참여를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지자들의 친정부 시위와 국민투표를 활용해 대통령 연임 제한 조항을 폐지하고 입법부·사법부까지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정치적 야심을 채웠을 뿐이란 비난을 듣는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중독재를 추구한 셈이다. 남미판 파시스트라는 평가도 듣는다. 또 외세를 악으로 보고 철저한 반미주의를 펼치면서 식량·소비재 등 경제적 자급을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생필품 부족과 인플레만 유발했다.

남미 최초의 좌파 대통령인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도 차베스가 존경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공산당 후보였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좌파 후보 단일화를 이루면서 36.62%의 득표율로 당선했다. 아옌데는 외국자본의 추방과 산업 국유화 등의 정책을 추구했다. 이를 차베스가 배워 고스란히 답습했다. 아옌데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정권과 목숨을 함께 잃었다.

하지만 아옌데는 칠레가 민주화되고 피노체트 일당이 군사정권 당시의 반인륜적 범죄로 단죄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된 칠레는 아옌데의 정책을 다시 실시하는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복지를 가미한 새로운 정책으로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을 이뤄가고 있다. 아옌데의 정책은 오히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 계승되고 있다. ‘아옌데 시즌2’가 본국인 칠레가 아닌 베네수엘라에서 펼쳐진 것이다.

차베스는 또한 쿠바 사회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1926~12016)를 평생의 멘토로 삼았다. 격렬한 반미는 상당 부분 카스트로의 가르침이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의 아이디어 역시 카스트로로부터 배웠다. 차베스는 쿠바는 물론 볼리비아·니카라과·에콰도르 등 이웃 좌파국가에 석유를 싼값에 공급하고 거액의 경제원조를 하며 정권유지를 도왔다. 특히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른 쿠바는 사실상 차베스의 원조로 연명하다시피 했다. 반미가 가난을 구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쿠바는 자국의 자랑인 의사를 포함해 풍부한 의료 인력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해 차베스를 지원했다.

카스트로와 함께 중남미 좌파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1928~1967)도 차베스의 정신적 스승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였던 그는 중남미를 두루 여행하며 가난과 차별, 그리고 사회적 모순을 목격한 뒤 혁명에 뛰어들었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에도 중남미 전역에 혁명을 확산하려고 나섰다가 볼리비아 산중에서 사살됐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에 머물던 시절에 찍혔던 사진 등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혁명의 아이콘으로 사용되면서 영원한 젊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얻었다. 차베스는 게바라의 이미지 정치를 사랑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수많은 반정부 시위를 막지 못했다.

차베스는 파나마 지도자였던 오마르 토리요스(1929~1981)에게도 존경을 표시했다. 1968~81년 집권하면서 내정에선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소련에는 반대해 미국의 지지를 얻었다.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과 담판해 파나마 운하의 주권 회복을 약속받았다. 운하는 1999년 12월 31일 자정 파나마 소유로 돌아왔다. 그 후광인지 아들 마르틴이 민주선거를 통해 2004~08년 대통령을 지냈다. 차베스는 토리요스를 존경했지만 그의 지혜와 전략, 그리고 융통성까지 배우지는 못했다.

이런 차비스모가 이제 수명을 다해 황혼을 맞고 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말이다. 포퓰리즘 정책의 실패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사정이 그 증거다. 포퓰리즘이 하나의 정치적 풍토병으로 자리 잡은 남미에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벌어질지 주목된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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