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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두환 회고록을 읽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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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라이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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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자서전을 읽는 건 썩 ‘가성비’가 높은 일은 아니다. 투입 가격·시간 대비 효율성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 손에 쥐게 되는 건 이런 일화들을 만날 수도 있어서다.

1997년 대선에서의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두고 당시 자민련 사무총장이었던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 한 증언이다.

“지원유세 비용으로 (DJ의) 국민회의로부터 받은 건 80억원이었다. 놀랍게도 그 돈은 모두 현금이었다. 그만한 현금을 받으려면 차떼기 외엔 방법이 없었다. 특이한 건 국민회의 측이 준 돈이 모두 1만원권 지폐였는데 전부 헌 돈이었다는 점이다. 띠지가 아닌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당 계좌로 입금하기 위해 은행으로 가져가 기계로 세어보니 액수가 달랐다. 100장짜리라고 묶인 돈이 거의 다 한두 장씩 모자랐다. 누군가 고무줄로 묶으면서 슬쩍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그 와중에도 실소가 나왔다.”(『열정의 시대』)

검찰 수사관들이 헌 돈 1만원권 70만 장(70억원)을 직접 쌓아본 일이 있다. 가로 1m, 세로 2m30㎝에 높이 40㎝였다고 한다. ‘돈방석’을 넘어선 ‘돈침대’였다.

2007년 대선 국면을 다룬 정두언 전 의원의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시간』엔 국세청 고위 간부의 놀라운 생존술이 묘사돼 있다. 재산·세무조사 건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형 이상득 전 의원을 주무르며 정적들을 하나둘 제거했다고 한다. 기가 찬 얘기들이다.

64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데모로 서울 전역이 들끓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민기식 계엄사령관과 나눈 대화도 있다.

“민 장군, 큰일 났소. 군부에서 김종필을 총살해야 시국이 해결된다고 하더라.”

“아니 군부라면 누구를 말하냐. 군은 내가 총책임자 아니냐.”

“김종오·김계원·김재규다.”(신경식, 『7부 능선엔 적이 없다』)

김종오 장군은 그로부터 2년 후 숨졌다. 나머지 둘은 각각 박 대통령 암살 현장의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기이한 인연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논란이다. 몇 년 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저작을 두고도 유사했다.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든 않든 다양한 시각의 사료가 풍부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국가를 책임졌던 이들로선 기록을 남기는 게 의무일 수 있다. “모든 훌륭한 역사는 낯섦에서 시작한다. 과거는 편치 않아야 하기 때문”(역사가 리처드 화이트)이다. 내밀한 권력 풍경 얘기, 때론 불쾌하고 언짢게 여겨질지라도 다다익선이다.

고정애 라이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