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보그·인스타일 등 패션 매체들이 온라인에 게재한 공항 패션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할리우드 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미국 로스앤젤레스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인데, 어깨에 멘 단순한 디자인의 가죽 핸드백이 눈길을 끌었다. 팬들의 예상과 달리 이 핸드백은 유명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가격이 비싸지도 않은 미국의 신생 온라인 패션 브랜드 ‘에버레인(everlane)’ 제품이었다. 졸리뿐 아니라 수퍼모델 지지 하디드, 영화배우 제시카 알바 등 패션 피플들은 에버레인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사진으로 종종 등장한다. 에버레인(www.everlane.com)은 고품질 제품을 합리적이고 투명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201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탄생했다.
‘투명한 가격’ 패션 스타트업 인기 #원가 7달러 티셔츠 50달러에 파는 #불합리한 기존 유통 관행에 맞서 #바가지 없이 제작비에 적정이윤만 #같은 품질 물건값 4분의 1로 낮춰
![하고 새들백. [사진 하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adce9be2-4f5f-4cba-88a1-27090cb57262.jpg)
하고 새들백. [사진 하고]
#국내 온라인 패션·리빙 브랜드 ‘하고’는 최근 말안장 모양의 새들백을 19만8000원에 구매할 고객 200명을 모았다. 일정 기간 내에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일정한 고객 숫자가 채워지면 그때부터 생산에 들어가는 크라우드 펀딩 방식이다. 재고가 남지 않기 때문에 가격을 싸게 책정할 수 있다. 첫 번째 펀딩은 3주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후에도 주문 문의가 이어져 이달 2차 펀딩을 진행할 계획이다. 하고(www.hago.kr)는 거래 과정을 상세하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디자이너 의류와 패션 액세서리, 홈 제품을 판매하는 큐레이션 플랫폼이다.

에버레인은 제조 공장과 생산원가를 공개하면서 소비자 가격을 제시한다.
에버레인과 하고는 요즘 젊은 소비자와 벤처 투자자 양쪽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패션 브랜드 겸 스타트업 기업이다. ‘높은 품질, 낮은 가격’은 유통업계, 나아가 제조업체에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두 브랜드의 무엇이 할리우드 스타부터 일반 고객까지 사로잡은 걸까. 바로 원가 공개라는 파격적인 전략이다. 두 브랜드 모두 생산 과정과 제조 공정별로 소요되는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여기에 적정한 이윤을 붙여 소비자 판매가격을 책정한다.
지금까지 패션은 옷이 아니라 꿈을 판다는 명분으로 이성과 합리의 영역을 넘어서서 가격을 책정하고 제품을 유통해 왔다. 오랜 기간 패션 세계를 지배해 온 이런 룰과 관행에 패션 스타트업들이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에버레인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마이클 프레이스먼의 표현대로 “과격하게 투명한 가격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직 이런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패션 스타트업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에버레인은 매출이 급상승하고, 대규모 투자금을 유치하는 등 스타트업 업계 핫스타로 떠오르며 ‘밀레니얼 세대의 갭(GAP)’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주목받고 있다.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을 만드는 이탈리아 비첸차에 있는 제조업체. [사진 에버레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f4fe8857-c7e9-4c35-aae0-985904d9add2.jpg)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을 만드는 이탈리아 비첸차에 있는 제조업체. [사진 에버레인]
프레이스먼 CEO는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유통 업계에 개선할 점이 있는지 자세히 뜯어보니 이 분야는 모든 산업 가운데 가장 불투명했고 비효율로 가득했다”며 “소비자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더라”고 창업 동기를 설명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생산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기본 티셔츠 제조 비용은 약 7달러(약 7800원)인데,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은 약 50달러(약 5만6000원)였다. 원가의 7배에 소매가격이 매겨졌다. 프레이스먼은 “유통구조를 개선하면 소비자는 같은 품질 제품을 기존보다 싼 가격에 살 수 있고, 기업도 적정한 이윤을 남길 수 있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을 만드는 이탈리아 비첸차에 있는 제조업체. [사진 에버레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591189b1-9ca4-43da-80d1-99e94745c273.jpg)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을 만드는 이탈리아 비첸차에 있는 제조업체. [사진 에버레인]
그는 구글 검색으로 이탈리아 등지에서 럭셔리 브랜드에 제품을 공급하는 고급 제조업체들을 찾아냈다. 이곳에서 비슷한 퀄리티로 에버레인 제품을 만들어 원가를 공개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버레인 매출액은 2015년 560억원에서 2016년 1125억원으로 뛴 것으로 업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생산원가 205달러, 판매가격 365달러인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 [사진 에버레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5707eee2-74d8-451d-8406-3a4f348ea3ec.jpg)
생산원가 205달러, 판매가격 365달러인 에버레인 가죽 토트백. [사진 에버레인]
![에버레인 슬립온 슈즈. [사진 에버레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acb6f2be-e1a6-4952-847e-32b83cf115a0.jpg)
에버레인 슬립온 슈즈. [사진 에버레인]
졸리가 든 에버레인의 ‘페트라’ 토트백은 온라인몰 제품 설명에 ‘투명한 가격 정책’이라는 항목 아래 공정별 제조 비용과 회사의 이윤을 적어 넣었다. 이탈리아산 가죽 100달러, 하드웨어(지퍼·금속 장식) 33달러, 인건비 51달러, 관세 8달러, 항공 운송비 13달러 등으로 비용을 세분화했다. 이를 모두 더한 원가는 205달러(약 23만3700원)이며, 에버레인 판매가격은 365달러(약 41만6100원)라고 알려준다. 회사가 이윤 160달러를 가져간다고 공개한 것이다. 백화점 등 기존 유통 경로를 통해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약 1300달러에 판매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고도 원가 비용을 공개한다. 새들백(19만8000원)을 구매할 200명의 투자자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집할 때 이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순제작 비용이 9만7000원임을 공개했다. 원가의 두 배 조금 넘는 가격에 펀딩을 진행한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하고 창업자인 홍정우 대표는 “백화점에서 40만~50만원에 판매하는 가방과 같은 퀄리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며 “사이트에 원단 가격, 임가공 비용, 포장재 가격까지 원가를 솔직하게 공개해 고객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펀딩 받은 투자금으로 정해진 수량을 제작하기 때문에 기존 패션 브랜드에서 제품 가격 상승 요인이 되는 재고 부담을 해결했다.
![4월말까지 300명을 목표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중인 하고 가죽 쇼퍼백. 생산 원가(9만4000원)와 판매가격(19만8000원)을 공개했다. [사진 하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13/1fda2f6b-f2bf-4298-a683-79e4df013e33.jpg)
4월말까지 300명을 목표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중인 하고 가죽 쇼퍼백. 생산 원가(9만4000원)와 판매가격(19만8000원)을 공개했다. [사진 하고]
호주 청년 두 명이 2014년 홍콩에서 창업한 온라인 기반 패션 브랜드 ‘그라나(www.grana.com)’는 원단 조달 방식의 투명성을 전략 포인트로 삼았다. 페루 피마코튼, 몽골 캐시미어, 중국 실크, 일본 데님, 이탈리아 울 등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급 산지에 가서 대량으로 원단을 구매한 뒤 옷을 만들어 판매한다. 창업자 루크 그라나는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좋은 소재에 대한 욕구가 커져 이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짰다”며 “원료를 구매하는 과정을 온라인에 상세하게 소개해 신뢰를 쌓는다”고 말했다. 그라나는 2015년 블루벨그룹 등으로부터 250만 달러(약 28억원)를 투자 받은 데 이어 지난해말 알리바바 창업펀드 1000만 달러(약 112억원)를 유치했다.
투명성을 앞세운 패션 스타트업이 선전하는 이유는 브랜드 자체보다 품질은 좋으면서 가격이 비싸지 않은 제품을 선택하는 똑똑한 소비가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가격 거품을 뺀 패션을 원하면서도 제품의 질을 포기하지 못하는 패션 소비자가 주 고객인 셈이다. 프레이스먼은 “오늘날 소비자들은 기업이 적정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알기 때문에 과격할 정도의 투명성을 앞세워 신뢰할 수 있는 콘텐트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제품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많이 접한 밀레니얼 세대 소비자들은 백화점에 가지 않고도 좋은 제품을 구하는 방법을 늘 찾기 때문에 패션 스타트업이 환영받고 있다”며 “실제 제품을 만드는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고, 대량 재고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윤리적·환경친화적이라는 인식도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라고 전했다.
패션 스타트업 마케팅 포인트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홍콩·한국의 패션 스타트업들은 원가를 전격 공개함으로써 질 좋은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조업체 이름과 위치, 작업 환경도 공개한다. 저임금 근로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만드는 저가 패션과 차별화하는 전략이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