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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정승화 전육참총장이 말하는 「12·12사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0·26직후의 비상계엄당시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씨에 있어 79년의 12·12사태는 개인적으로는 4성장군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비극을 가져왔고 국가적으로는 제5공화국의 서막을 여는 계기였다.
정씨는 지난 9월 본사기자에게 역사의 기록을 위해 12·12전후의 상황을 설명했었다.
80년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래 서울강남구대치동 쌍용아파트에 침거해온 정씨는 지난9월 12·12사태를 묻는 기자에게 『힘을 쥔 한쪽이 이게 옳다고하면 다른 한쪽은 나쁜 것 아니냐』고 했다.
정씨는 군을 순수하게 이끌어 가보려던 자신이 소수의 정치군인들에게 당한것이라고 단언하면서 그러나 패배자인 자신이 무슨말을 더하겠느냐고 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한 정씨는 그러나 12·12당일 시내 모처로 연행된 순간을 언급하면서부터 격앙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내가 그래도 4성장군인 육군참모총장이오. 내앞에서 감히 고개도 못들던 ××들이 나를 감히….』 정씨는 그 순간을 되뇌며 『박종철군의 고문치사때 내무장관이란 자가 「고문은 있을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어쩌고 했는데 그런 뻔뻔스런 말을 어떻게 할수있어요. 현역 참모총장을 부하란 자들이 그렇게 하는 마당에…. 내가 한때 장으로 있던 조직에서 그런 일이 났으니 정말 국민에게 부끄러워 내가 당했다손 치더라도 무슨 말을 하겠소…』라며 12·12 전후의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날 저녁7시쯤인가,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아내와 함께 외출준비를 하고있었지요. 마침 그날 발표된 장군 승진자 명단에 처남 신모대령(육사15기)이 끼어있어 오랫동안 와병중인 장모를 기쁘게 해드릴겸 해서 찾아뵙기로 했던 거지요. 그때 마침 TV저녁뉴스가 시작돼 그걸 보고 있노라니 부관인 이재천소령이 올라와 『보안사 처장이 보고하러 왔습니다』고 하더군요.
1층거실에서 기다리라 해놓고 잠시후에 갔더니 두사람이 있습디다. 한사람은 내가 데리고 있던 육본 CID단장 우모대령인데 이번 장군승진에서 탈락한 거예요. 그래 『다음번엔 꼭 승진시키도록 하지, 미안허이』했습니다. 다른 한사람은 얼굴을 몰랐어요. 『자네가 보안사처장인가』고 했더니, 그렇다며 자기 소개를 합디다.
그래 『급하다는 보고가 무언가』고 물었더니 보안사처장(허모대령)이라는 사람이 『총장님, 김재규한테서 돈을 많이 받았더군요』라고 해요. <김재규는 그해 추석 정총장에게 7백만원을 건넸다고 했고 정총장은 3백만원이었다고 주장>『김이 그러던가』라며 벌써 얘기가 끝난 것인데 뭘그러느냐고 했습니다.
허대령은 그 차이가 크므로 다시 진술해야겠다고 해요. 녹음을 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녹음기가 준비됐느냐』고 했더니 안됐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집에도 작은 녹음기가 있으니 그걸로 하지』했는데도 『녹음시설이 잘된 저희 부대로 가주셔야 겠습니다』고 하는 거예요.
뭔가 큰 오해가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듭디다.
김재규가 나를 물고 들어갔고 최규하대통령이 뭔가를 오해하게 된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아, 내가 계엄사령관이야. 버르장머리 없는 ×들 같으니. 최대통령이 허가를 하시더냐』고 했는데 『대통령각하의 윤허를 받았습니다』고 해요.

<이날 하오5시40분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최대통령을 총리공관으로 방문, 정총장의 연행동의를 구했으나 최대통령은 노재현국방장관을 통해 건의하라며 거부했고 13일 새벽4시 국방부 청사 지하실에 있던 노장관이 나중에 동의함으로써 사후 동의가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부관을 불러 『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는데…. 부관, 총리공관에 전화를 걸어. 안계시면 국방장관을 연결해줘』라고 지시했습니다.
부관 이소령이 현관 왼쪽의 부관실로 뛰어 들어갔고 그 직후 총성이 울렸습니다.
두 대령이 나의 팔을 양쪽에서 끼더니 『총장님, 갑시다』며 일으켜 세우더군요. 『그래, 가자』며 일어서는데 현관 창문을 깨고M-16소총을 든 감색야전점퍼차림의 군인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공포를 몇발 쏜뒤 총구를 내가슴에 갖다대고 몇번인가 쿡쿡 쑤셨습니다.

<허대령이 정총장의 왼쪽팔을, 우대령이 오른쪽 팔을 끼고 있었으며 우대령은 달려든 2명의 경비병에 의해 낚아채이는 순간 총을 맞았고 허대령은 두명의 경비병을 뿌리쳐냈다> 『총구가 내 뺨에 닿아있는 상태로 현관에 대기중인 세단차에 떠밀려 들어갔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내 양쪽에는 수사관 두명이 함께탔고 차가 공관정문을 빠져나가는데 초병은 그냥 서 있었습니다.
내가 상부의 명령으로 체포돼 가는 줄 알고있던 모양입니다』 『뒤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원들에게 비상이 걸려 아직 그곳에 남아있던 수사관들을 포위, 공격함으로써 총격전이 본격화됐다고 해요. 이때 집사람은 끊어지지 않은 경비전화를 이용, 유병현 한미연합사부사령관·윤성민참모차장 및 이희성중앙정보부장서리등에게 긴급연락을 취했답니다.

<육본에 상황을 알린 것은 수사관들이 왔을때 찻잔을 날라준 김모 일병이며 7시40분쯤 연락을 받은 육군은 8시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12·12당일의 순간들을 다시 한번 되새긴 정씨는 박정희대통령이 피살되던 궁정동 현장 옆건물에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가 있었던 미묘한 자신의 처지때문에 공정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층 더 배려했으면 했지 방해한 일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비상계염하에서 군이 정치개입을 한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 매일 열리는 시국대책회의에도 참석안하려 했으나 최대통령의 권유로 부득이 참석하는등 아주 조심했다고 했다.
정씨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했던 자신이 정치군인들에 의해 굴욕을 맛보게된 것이라면서 당시 다수 군장교들이 정치성있는 군인들의 숙청을 주장하고 나설때도 혼란을 막기 위해 오히려 무마했노라고 했다.
다만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겠다는 건의를 12월9일 골프장에서 국방장관에게 했으나 김재규재판이 계속중일때 수사책임자를 전보시키는 것은 일반의 의혹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일시 유보하라는 국방장관의 말에 따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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