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뽑기'에 빠진 중고생들, 도대체 왜?

중앙일보

입력 2017.04.12 11:49

최근 중고생 사이에서 '인형 뽑기'가 유행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역 인근 인형 뽑기방에서 학생들이 인형 뽑기를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최근 중고생 사이에서 '인형 뽑기'가 유행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역 인근 인형 뽑기방에서 학생들이 인형 뽑기를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11일 오후 5시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단지 상가에 있는 '인형 뽑기방'. 교복 차림의 고교생 10여 명이 게임기 앞으로 모여들었다. 학생 중 하나인 이모(17)이 게임기 중 하나를 골라 1000원짜리 지폐 한장을 집어넣었다.

고시생, 대학생, 직장인 이어 청소년에 번져

'득템' 인증샷 올리고 인형 온라인 직거래도

독서실비, 옷값 등 인형뽑기에 탕진 부작용

전문가들 “입시경쟁 속 인정욕구 충족 도피처”"

"야단치기보다는 성취감 느낄 기회 열어줘야

조이스틱을 상하좌우로 흔들어 삼발이처럼 생긴 '집게발'을 자기 좋아하는 피카추 인형 위로 움직였다. 버튼을 누르자 집게발이 내려와 인형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집게발이 올라가다 인형이 떨어졌다. "아, 아깝네" 하며 이군은 두 번이나 더 1000원짜리를 넣었다. 결국 세 번 째 도전 만에 피카추 인형을 '득템'(아이템 획득) 했다.


이군은 "일주일에 서너 번 여기에 온다"고 했다. “거의 다 뽑았는데 아슬아슬하게 놓친 인형이 있으면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려서요." 이군 같은 학생들은 인형 뽑기를 잘하는 비결도 '공부'한다. 유튜브엔 인형 뽑기 고수들이 비법을 전수해주는 강의도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꿀팁'을 전수한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온다. 

인형 뽑기 기계는 20여 년 전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인형 뽑기가 고시생·대학생·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런데 최근엔 중고생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 여기엔 스마트폰을 이용한 인증샷 찍기, 중고생 간의 '득템 거래' 등 청소년의 또래 문화가 한몫하고 있다. 

사들은 “학생들이 온라인 직거래에서 인형을 팔아 게임비를 충당하고, 인증샷을 올려 서로 간에 자랑하는 문화 때문에 인형 뽑기 유행이 빠르게 확산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의 한 고교 교장은 지난 주말 우연히 학생회 임원인 2학년 학생의 페이스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등생인 이 학생의 페이스북엔 "주말에 홍대·노량진 원정을 다녀왔다"는 설명과 함께 인형 뽑기방 앞에서 찍은 인증샷이 올려져 있었다. 이 교장은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건 알았지만 인형 뽑기 인기가 이 정도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형 뽑기가 번지는 것에 대해 "청소년들이 인형 뽑기에서 성취감과 인정 욕구를 얻으려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김경록 기자 

전문가들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형 뽑기가 번지는 것에 대해 "청소년들이 인형 뽑기에서 성취감과 인정 욕구를 얻으려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김경록 기자

청소년 사이에서 인형 뽑기를 잘하는 친구들은 ‘뽑기왕’ ‘프로뽑기러’ 등으로 불린다. 뽑기왕들은 '득템'을 자랑하기 위해 학교에 매고 다니는 배낭에 인형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도 한다. 지난해 이 동네로 전학온 고 2 김군(17)은 인형 뽑기 실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김군은 하루 만에 뽑은 인형 대여섯개를 배낭에 달고서 학교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자 인형을 선물로 나눠줬다. 김군은 “전학 초기엔 친구가 없었다. ‘프로뽑기러’라고 알려진 이후로 다른 반 친구들도 찾아와 요령을 물어본다. 관심을 얻으니 기분이 좋다. 덕분에 친구도 생겼다”고 했다.

인형 뽑기는 한 판에 1000원을 낸다. 뽑기왕들은 자기가 뽑은 것을 팔아 게임비를 충당하기도 한다. ‘중고나라’ ‘번개장터’ 등 온라인 장터엔 ‘피카추 인형 30㎝ 6000원’ ‘고라파덕 30㎝ 7000원’ 등 인형을 매물로 내놓는 글이 수시로 올라온다. 

중앙일보 1999년 11월 23일자 기사 캡처. 서울 신림동 고시촌 고시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인형 뽑기를 소개했다. 한 달에 수백만원을 날리는 부작용도 언급됐다. [중앙포토]

중앙일보 1999년 11월 23일자 기사 캡처. 서울 신림동 고시촌 고시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인형 뽑기를 소개했다. 한 달에 수백만원을 날리는 부작용도 언급됐다. [중앙포토]

10일 홍대 앞의 인형 뽑기방에서 만난 최모(고1·16)양도 이런 학생 하나다. 최양은 “인형 뽑기방에 올 때마다 1만원 정도 쓴다. 나중에 팔 것을 생각하면 2개만 뽑아도 본전이고 3개를 뽑으면 이익이다. 게임비가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한다”고 얘기했다.

최양은 수시로 SNS에 자신이 뽑은 인형의 인증샷을 올린다. 피카추·파이리·꼬부기 등을 모아 인증샷을 올렸더니 ‘한 개만 달라’ ‘멋지다’는 댓글이 순식간에 100개 정도 달렸다고 한다. 최양은 "반응이 뜨거우면 선망의 대상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인형 뽑기가 청소년 사이에 번진 데엔 TV 예능 프로그램도 작용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부 연예인이들이 자기 취미로 인형 뽑기를 소개하면서다. 송진호 메타학습연구소 대표는 “이런 프로그램을 본 청소년들이 ‘쿨하고 멋진 취미’라고 여기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입시 교육에 갇혀 지내는 청소년들이 인형 뽑기를 일종의 '도피처'로 보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성적 경쟁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학생일수록 인형 뽑기에 빠져든다. 단순하면서도 결과물을 바로 손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친구들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심리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인형 뽑기를 한다는 한모(16·고1)양의 설명에서도 입증된다. 한양은 “꼭 인형이 갖고 싶어 뽑기를 하는 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까지 내게 ‘피카추를 뽑아달라’고 부탁하고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인형 뽑기가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회사원 김모(45·서울 송파구)씨는 최근 중2인 막내딸과 크게 다퉜다. 김씨는 “교복에 걸칠 가디건이 필요하다”는 딸의 말에 5만원을 줬다. 그런데 딸이 거스름돈을 가져오지 않고 '사겠다'던 가디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김씨가 캐묻자 딸은 "인형 뽑기에 모두 썼다”고 실토했다.

김씨는 “딸 친구 중에는 한달 용돈을 전부 인형 뽑기에 쓰고도 인형 뽑기를 또 하려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씨는 “내 눈에는 인형 뽑기가 일종의 도박처럼 보인다. 우리 딸이 이런 데 재미를 붙인 것 같아 걱정스럽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부모 눈에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서 자녀를 다그치거나 야단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윤대현 서울대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청소년들이 인형 뽑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주변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이라며 “자녀를 자주 칭찬하고 아이가 원하는 취미를 할 수 있게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문경보 문청소년 교육연구소장도 “호기심에 시작한 학생에게 ‘잘못됐다’고 몰아세우면 오히려 인형 뽑기에 더 몰두하는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아이가 성취감을 느낄 기회를 다양하게 열어주고 격려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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