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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미·중한테 버림받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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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미·중 정상의 플로리다 잔치는 끝났다. 트럼프는 뭔가 먹어 치워야 하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는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난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헝그리 복서처럼 말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참 격 떨어지는 얘기다 싶었다. 하지만 그의 취임사에 “미국을 안전하게 만들고 미국인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는 대목을 상기했다. 안전과 일자리를 향한 그의 강박증에 가까운 집념으로 이해했다. 시진핑의 접근법은 상대적으로 우아했다. “중국과 미국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1000개가 있지만 관계를 깨뜨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작은 이익이라도 걸리면 낯빛을 바꾸고 달려드는 소인면혁(小人面革)이 생각나 쓴웃음이 나왔다.

트럼프·시진핑 플로리다 잔치 결산 #후보들 어설픈 ‘자주 놀이’ 멈출 때

결국 트럼프는 큰 것을 얻어 냈다. 이른바 ‘무역 100일 계획’이다. 앞으로 100일 안에 미·중 간 무역 불균형을 뚜렷하게 개선하기로 시진핑과 합의했다. 시진핑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전운이 감도는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장치들을 마련했다. 양국이 경제와 안보를 일부분씩 주고받은 모양새다.

문제는 우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졌다. 북한 핵, 사드는 풀 수 없는 모순(矛盾)임이 드러났다. 둘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면 다른 해답은 없다. 시간의 위대한 힘을 믿거나 그들의 생각이 바뀌길 기다려야 한다. 아니면 모종의 환경 변화로 미·중 핵심 이익이 변경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모종의 환경 변화는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김정은이 중국한테까지 대놓고 미사일 협박을 하는 상황이다. 상상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게 요즘 세상이다. 김정은의 배포가 자기 아버지를 능가하는 만큼 러시아와 손잡고 미·중과 고독한 대결을 선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한국에서 환경 변화의 가능성은 좀 더 현실적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뒤 사드 배치를 국회 의결로 거부하는 시나리오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당론으로 사드 배치를 사실상 반대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예상된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한국의 사드 반대, 자주적 평화주의자들이 그리는 반미(反美)적 이상이 실현되는 미래다. 여기에 새 대통령이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을 선언하고 김정은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외교적으로 친중국권으로 분류된다. 중국은 사드 보복을 중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도 잊어선 안 된다. 한국은 대북제재를 세밀히 규정한 유엔 결의안 위반국이 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현금으로 도와주는 나라로 비난받는다. 트럼프가 한·미 동맹 조약의 종결을 통보해도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미군 철수,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이 한국의 휴전선에서 일본의 서해안으로 후퇴하는 일들이 차례로 뒤따를 것이다.

내 예측이 무책임한 이분법적 상상력이라고 지적받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상황을 무책임하게 방치해 두기로 한 건 트럼프와 시진핑이지 내가 아니다. 그다음 수순은 미국의 마이웨이. 트럼프는 플로리다 회담에서 시진핑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한국의 새 정부한테 할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코스를 가겠다.” 어느 유력 대선후보는 “미국이 어떤 대응을 하든 반드시 우리와 사전 협의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사드를 깬다면 동맹국으로서 한국이 미국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게 트럼프 정부의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선주자들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세계의 안보 상황이 우리의 우물 안 개구리식 ‘자주 놀이’를 비웃고 있다. 한·미 동맹을 굳게 하고 국론을 한데 모아 중국한테 당차게 나가자고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게 정도다. 안보 문제를 두고 어설프게 양다리를 걸치다간 미·중 모두한테 버림받는다. 미국과 중국은 자기들끼린 핵심 이익을 주고받는다. 한국이 국제 미아가 되지 않게 대선주자와 유권자가 냉정해져야 할 때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