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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돈 굴리는 위험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것 막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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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21면

[투자은행의 세계]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도이치뱅크 본사. 도이치뱅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빚 보증을 놓고 이해상충의 딜레마에 빠졌다. [로이터=뉴스1]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도이치뱅크 본사. 도이치뱅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빚 보증을 놓고 이해상충의 딜레마에 빠졌다. [로이터=뉴스1]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옛 동료를 만나러 갈 땐 날씨와 스포츠를 주제로 얘기하는 법을 먼저 배워라.”

고객 상대 영업과 직접 투자 병행 #손실 떠넘기려는 유혹 생길 수도 #영업·투자 부서간 정보공유 차단 #고객 이익을 직원 평가에 반영 등 #평판 위험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제이크 시워트 골드만삭스 대변인이 직원들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민감한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경고다. 그 자신이 민주당 정권 시절 백악관과 재무부에서 대변인으로 일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후 많은 골드만삭스 출신자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하면서 옛 직장과의 인연이 경제·금융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삭스 회장과 그의 2인자 역할을 오래 한 개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사적으로 만나 나눈 일상적인 대화도 유력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의심의 눈초리는 고위 공무원으로 신분이 바뀐 옛 동료들만 겪는 것이 아니다. 골드만삭스도 금융기관으로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이다.

골드만삭스의 14가지 비즈니스 원칙 중 첫째가 ‘고객의 이익이 항상 최우선’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들리는 이 문구가 첫 자리를 꿰찬 것은 그만큼 고객의 이익이 아닌 다른 사람 또는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려는 유혹이 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의 문제다. 이해상충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이익 간의 충돌이다. 금융처럼 높은 전문성이 필요되고 정보의 비대칭성이 큰 영역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한 고객의 이익을 위해 다른 고객의 이익을 희생하거나, 고객의 이익보다 금융기관 스스로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는 경우 등이 대표적인 예다.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파인 회장(왼쪽)과 마이클 에반스 전 부회장 (현 알리바바 사장). [사진 블룸버그]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파인 회장(왼쪽)과 마이클 에반스 전 부회장 (현 알리바바 사장). [사진 블룸버그]

고객 정보 악용한 월가 은행들, 대공황 불러

금융업체의 이해상충 문제가 등장한 것은 대공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월스트리트는 상업은행은 물론 투자은행(IB) 업무까지 겸한 유니버설은행의 전성기였다. 게다가 규제도 취약해 은행이 고객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길 수 있는 절대 우위의 위치에 있었다. 은행은 대출과 증권 업무를 넘나들며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부실 기업이 채권을 발행해 은행 대출을 먼저 갚게 할 정도였다. 결국 대공황을 초래한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을 금지하는 글래스-스티걸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해상충은 투자은행이 투자자의 대리인 역할을 할 때 나타난다. 수수료 수입을 올리기 위해 적합하지 않은 상품을 권유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상품을 매수자와 매도자 모두에게 영업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더 많은 돈을 굴리는 고객에게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객들 간의 이해상충보다 투자은행 내부의 이해상충이 더 자주 나타나고, 더 심각한 경우다. 고객을 상대로 한 투자은행 업무(증권 발행, 인수합병)와 시장조성(market-making) 거래 뿐 아니라 은행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수익을 내기 위한 프랍(proprietary) 거래가 한 지붕 아래서 이뤄지는 사업 구조 때문이다. 전통 IB 업무에 주력하던 골드만삭스는 1990년대 들어 기업 및 금융시장 분석 경쟁력을 살려 프랍 거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수료가 아닌 자본이득을 노린 위험 감수라는 새로운 투자은행 모델을 발전시켰고, 다른 투자은행들도 모방하기 시작했다.

사실 투자은행이 무리하게 위험을 감수하게 된 배경으로 1999년의 그램-리치-브릴리법 제정이 크게 작용했다. 글래스-스티걸법을 무너뜨린 이 법으로 최대 수혜자가 된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의 사업 영역을 치고 들어오자 순수 투자은행들은 더 공격적인 위험 감수로 맞선 것이다. 그 와중에 고객의 편에 서서 일하는 대리인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주인, 더 나아가 고객의 경쟁자 모습으로 비춰지면서 투자은행을 둘러싼 이해상충의 우려가 더욱 커졌다. 고객과 거래하면서 자신의 위험을 고객에게 넘긴다는 게 대표적 의혹이었다.

골드만삭스는 2006년 12월 최고경영진이 모기지 관련 위험을 모두 없애기로 결정한 이후 선제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큰 어려움 없이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그 당시 고객에게는 모기지 파생상품을 매수하도록 권유했다. 결국 자신의 위험을 떠넘기려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이해상충의 악용은 ‘평판 위험(repu tational risk)’으로 직결된다. 평판 위험은 기업의 브랜드가 손상을 입는 것으로 재무적 성과와 주가에 악영향을 끼친다. 글로벌 컨설팅사 올리버와이먼의 2016년 분석에 따르면 은행의 경우 평판 위험의 주가 영향력이 부과되는 벌금의 6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판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5분이면 족하다”는 워런 버핏의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골드만삭스는 회사에 쏟아지던 비난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2009년 거대 흡혈 오징어 얼굴을 하고 롤링스톤지의 기사에 등장했을 때도 이를 세간의 질시와 오해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2010년 모기지 파생상품 영업과 관련해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위기관리 모드에 돌입했다.

2010년 5월 기존 비즈니스 원칙을 재검토하기 위해 ‘비즈니스 표준 위원회(Business Standard Committee)’를 구성했다. 보스턴컨설팅 등 2개 컨설팅사에 자문을 의뢰해 주요 고객 200개 사를 직접 인터뷰하고 6개 영역을 선정해 39개 개선 목표를 세운 뒤 3년에 걸쳐 실행에 옮겼다. 위원회를 이끌었던 마이클 에반스 당시 부회장(현재 중국 알리바바 사장)은 우리나라를 수차례 방문해 금융감독원과 주요 고객사에게 신뢰 회복을 위한 개선 노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대형 증권사 육성 나선 한국도 대비 필요

투자은행은 이해상충으로 인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겹겹의 안전장치를 갖춘다. 첫째, 이해상충의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차이니즈 월(chinese wall)’을 엄수한다. 차이니즈 월은 사내 정보 교류로 고객의 이익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사업부 간 장벽을 치는 것이다. IB 업무와 고객 자산 운용 등 고객의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사업부와 기업 분석 및 프랍 거래가 속한 사업부 간에는 가장 높은 장벽을 쌓는다. 해당 사업부 간 출입은 물론 전화· e메일 등 소통도 통제 대상이다. 차이니즈 월은 금융 외 영역에서도 활용되는데, 삼성전자가 부품 사업 고객인 애플의 요구를 받아들여 완제품(스마트폰)과 부품(반도체) 사업부를 독립적으로 양분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적합성(suitability) 심사’를 강화한다. 고객이 해당 거래를 충분히 이해하고 거래 이익이나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배경, 경험, 그리고 능력을 갖추었는지 사전에 심사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거래의 결과 나타날 이익이나 손실이 고객의 재무 상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거래, 유동성이 떨어지고 가격 산출이 쉽지 않은 복잡한 거래일수록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셋째,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는 고객 중심 문화의 강화다. 직원의 평가와 보상을 고객 이익을 최우선해 은행의 평판을 지키고 향상시킨 정도에 연계하고, 지속적인 사내 교육을 통해 고객 중심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의 경우 직원 평가에서 ‘고객 중심(client focus)’ 항목을 강화했다. 평가 대상자가 단기적 이익을 넘어 고객의 장기적 이익을 최우선했는지, 건실한 고객 관계와 신뢰를 튼튼히 하는 문화를 세우고 증진시켰는지 등 6가지를 확인한다. 2년 동안 블랭크파인 회장이 직접 참여하는 체어맨 포럼을 통해 전 직원에게 사내 교육을 했다. 필자 역시 2011년 여름 뉴욕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했는데, 전체 3시간 중 전반부는 기업 문화와 회장 연설, 그리고 후반부는 회사와 고객의 이익 간 딜레마 상황이 주어지고 그에 대한 해결안을 고민하는 사례 연구에 할애됐다. 고객과 오랜 관계 유지를 통해 함께 윈-윈한다는 골드만삭스의 암묵적 신조 ‘장기적 탐욕(long-term greed)’을 재조명하는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이해상충으로 가장 골치를 썩고 있는 투자은행은 도이치뱅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기 회사가 도이치뱅크에서 받은 대출 3억 달러에 대해 개인적으로 빚보증을 선 탓이다. 미국 대통령의 최대 채권자가 된 도이치뱅크는 빚보증을 그냥 풀어주자니 특혜 논란에 휩싸일게 뻔하고, 대출 구조를 재조정해 빚보증을 없애고 금리를 올리자니 트럼프의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한 상황이다. 게다가 금융위기 시절 모기지 증권의 불완전 판매, 지난해 러시아 자금 세탁 건 등으로 미국 법무부와도 엮여 있어 이래저래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은 전통 IB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의 위험 감수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해상충의 볼모가 되어 평판 위험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이는 금융당국이 투자은행 역할을 하는 증권사의 대형화를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앞으로 겪게 될 문제다. 대형화의 목적이 증권사가 덩치를 키워 모험자본의 공급자 역할을 하도록 하는데 있는 만큼 결국 증권사는 자기자본 또는 레버리지(부채)를 일으켜 위험 감수의 크기를 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형화에 발맞춰 복잡해질 사업 및 상품 구조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키워 이해상충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고객 중심 문화, 철저한 사전 심사, 차이니즈 월 등 내부 통제의 강화를 통해 이해상충의 문제를 차단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최정혁

전 골드만삭스은행 서울 대표
최정혁 경영학박사. 씨티은행, 크레디트 스위스, UBS에서 FICC(Fixed Income, Currencies and Commodities, 채권·외환·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다. 현재 대학에서 국제금융과 금융리스크를 강의하며 금융서비스산업의 국제화를 연구하고 있다. jungcho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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