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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벚 본적지는 일본 아닌 제주 … 265살 나무의 후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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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쉰살 진해 왕벚나무의 ‘자기소개서’ 

만개한 벚꽃이 말 그대로 ‘꽃대궐’을 이뤘다. 지난 4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천 주변 로망스 다리에서 상춘객들이 활짝 핀 벚꽃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추억을 담고 있다. 진해군항제 기간에 해마다 국내외 관광객 300만 명이 몰려든다. [송봉근 기자]

만개한 벚꽃이 말 그대로 ‘꽃대궐’을 이뤘다. 지난 4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천 주변 로망스 다리에서 상춘객들이 활짝 핀 벚꽃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추억을 담고 있다. 진해군항제 기간에 해마다 국내외 관광객 300만 명이 몰려든다. [송봉근 기자]

나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 여좌천(1.4㎞) 주변에 산다. 이름은 왕벚나무. 나이는 40~50년 됐다. 여좌천 주변에 6000여 그루(진해 전체 36만 그루)가 있다. 봄이면 국내외 관광객 300만 명이 내 꽃을 보려고 몰려든다. 2015년 미국 CNN 방송은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의 한 곳으로 꼽았다.

내 꽃이 화려하게 보이는 데는 비밀이 있다. 다른 나무와 달리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질 때쯤 잎이 나온다. 꽃 무더기만 있으니 더 밝고 화사하다. 밝은 분홍색이어서 낮에는 물론 밤 달빛을 받으면 더 환상적이다. 내 꽃은 3월 말 제주도를 시작으로 남해안에 상륙해 북상하면서 핀다. 4월 초·중순 전국 어디서나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벚나무는 왕벚나무 외에 사찰·야산에 많은 올벚나무·산벚나무 등 국내에 20여 종, 세계에 200여 종이 있다.

그런데 이맘때 나의 국적을 놓고 말이 많아 속상하다. 내가 일본에서 온 벚나무라는 오해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본적은 제주도다. 왕벚나무 자생지가 전 세계적으로 제주뿐이어서다. 제주도 서귀포시 신례리와 제주시 봉개동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의 선조(100~200년 이상 된 왕벚나무) 6그루가 있다.

지난해 발견된 수령 265년 된 제주 왕벚나무. [송봉근 기자]

지난해 발견된 수령 265년 된 제주 왕벚나무. [송봉근 기자]

왕벚 자생지 일본엔 없고 제주뿐
일본이 제주도서 왕벚 가져가 번식
1901년 일본 학자가 세계 첫 등록

일제 때 한국 곳곳에 다시 옮겨심어
해방 후 왜색 시비로 상당수 벌채
1960년대부터 ‘우리 왕벚’ 확산시켜


왜 내가 일본 나무라는 오해를 받는 걸까. 일본 도쿄대 식물학과 마쓰무라 진조(松村任三) 교수가 1901년 왕벚나무의 일본식 이름인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의 학명을 ‘프루너스 예도엔시스 마쓰무라(Prunus yedoensis MATSUMURA)’로 일본 식물학회지에 최초로 등록한 게 계기였다. 예도엔시스는 일본의 에도(江戶·도쿄)에서, 마쓰무라는 진조의 이름에서 각각 따왔다.

하지만 일본에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없다. 대신 1908년 4월 식물채집가였던 프랑스 에밀 타케 신부가 제주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처음 발견했다. 지난해 5월 제주시 봉개동 개오름(해발 607m)에선 265년 된 왕벚나무가 추가 발견돼 한국이 왕벚나무 자생지임을 입증했다. 개오름 왕벚나무는 높이 15.5m, 밑동 둘레 4.49m로, 지금까지 알려진 왕벚나무 중 가장 크다. 제주에는 이 외에 200여 그루 자생 왕벚나무가 있다. 일본은 최고 수령 150년 된 왕벚나무 개량품종이 있을 뿐이다. 왕벚나무 한국 기원설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은 “일본이 약탈 등 여러 방법으로 제주 왕벚나무를 가져가 다른 벚나무와 접목 등을 해 일본산인 ‘소메이요시노’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한다”며 “이 소메이요시노가 일제 때 다시 국내에 들어왔고, 한국산 벚나무와 접목 과정을 거쳐 전국 곳곳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일본 오사카성에 있는 왕벚나무. [사진 JNTO(국제관광진흥기구)]

일본 오사카성에 있는 왕벚나무. [사진 JNTO(국제관광진흥기구)]

국내 왕벚나무와 소메이요시노는 육안으로 구별이 힘들다. 2006년 미국 농림부가 한라산 관음사 부근의 자생 왕벚나무와 소메이요시노의 유전자(DNA)를 검사한 결과 유전자형 일부가 일치한 데서 알 수 있다.

나의 번식법은 독특하다. 씨앗 등으로 번식하면 제각각 다른 특징을 가진 벚나무가 만들어져서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비슷한 크기의 화려한 꽃을 동시에 피우기 위해 벚나무에 종자가 되는 왕벚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방식으로 왕벚나무를 증식한다. 국내에 심어진 왕벚나무가 대부분 뿌리 부분과 가지가 다른 이유다. 소메이요시노도 종자가 된 왕벚나무 하나에서 가지를 떼어내 다른 벚나무에 붙여 묘목을 복제한 ‘클론’ 형태다.

소메이요시노가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일제 강점기부터다. 일본은 1909년 창경궁에 소메이요시노를 조경수로 심었고, 진해에 일본 해군항을 1912년 건설하기 전에 1910년부터 진해시 도로변에 2만여 그루를 심었다.

해방 후 ‘왜색시비’가 일면서 진해 시가지(해군부대 내 제외) 등 전국에서 많은 소메이요시노가 벌채됐다. 대신 지금의 왕벚나무가 심어진 건 60년대부터다. 정부가 제주 왕벚나무 자생지를 1962년 천연기념물(156호, 159호)로 지정하는 등 보존에 나서면서 ‘우리나라 나무’라는 인식도 생겨났다. 이후 전국적으로 왕벚나무 가로수는 74만 그루로 늘어났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주 자생지의 왕벚나무 묘목을 만들어 시중에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에서 가져와 심은 소메이요시노의 가지 등을 떼어내 국내 벚나무에 접목해 묘목을 늘리거나 일본 교포가 보낸 묘목 등을 심은 게 대부분이다.

정은주 강원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진해는 60년대 재일교포가 보낸 왕벚나무 묘목, 여의도 윤중로는 창경궁에 심은 왕벚나무 일부를 옮겨 심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제주 자생 왕벚나무는 수령이 오래돼 국립산림과학원 등에서 증식해 일부 묘목을 키우고 있으나 아직 준비가 부족해 시중에 보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왕벚나무의 본적이 한국땅인데 벚꽃을 감상하는 문화는 왜 일본에서 비롯됐을까. 한국은 집을 짓거나 공예·인쇄용 등 목재로서의 벚나무를 중시했다. 반면 일본은 소메이요시노 사쿠라(櫻·벚꽃의 일본식 표현)를 즐기기 위해 관상용을 많이 증식했다.

제주에 100~200년 된 왕벚 6그루
일본은 150년 된 개량 품종이 최고령
미국 농림부 DNA 검사서 일부 일치

한국은 목재, 일본은 관상용으로 써
씨앗 대신 나뭇가지 접붙여 번식
올벚·산벚 등 국내에 20여 종 서식 

한국에선 제주도의 ‘제주 왕벚꽃 축제’ 등 전국적으로 매년 40~50여 곳에서 축제가 열린다. 최초 사례는 62년 시작된 진해 군항제다. 진해 군항제도 원래 벚꽃 축제 개념은 아니었다. 중원로터리에 52년 국내 최초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지면서 이듬해 동상 앞에서 추모행사를 연 것이 군항제의 효시다. 군항제 때마다 추모대제나 승전행차 같은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6년 미 농무부의 왕벚나무 DNA 검사에 참여했던 정은주 강원대 교수는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심은 왕벚나무 때문에 워싱턴 D.C. 등 미국 전역에서도 벚꽃(cherry blossom) 축제가 열리지만 미국인들은 일본 문화를 체험한다기보다는 자연의 벚꽃 자체를 더 즐긴다”며 “일본 잔재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자연의 꽃을 즐긴다는 시각에서 벚꽃축제를 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찬수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은 “현재 벚꽃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제주 자생 왕벚나무 묘목을 키우는 사업을 추진 중”이라며 “2022년부터는 제주산 왕벚나무 묘목으로 기존 왕벚나무와 교체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진해·제주·여의도·경주 등 40~50곳서 벚꽃 축제

진해군항제 기간동안 환경정화 캠페인에 나선 진해여중생들.[사진 JNTO(국제관광진흥기구)]

진해군항제 기간동안 환경정화 캠페인에 나선 진해여중생들.[사진 JNTO(국제관광진흥기구)]

3월 말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벚꽃축제가 한창이다. 특히 8~9일에는 벚꽃이 만개해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 비’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올해로 28회째를 맞는 제주왕벚꽃축제(3월 31일~4월 10일)의 벚꽃 명소는 애월읍 장전리, 전농로, 제주대 입구 등 3곳이다. 55회째인 진해군항제(4월 1~10일)는 1.5㎞ 길이의 여좌천 주변의 왕벚나무길이 가장 인기다. 국회 뒤쪽인 서울시 영등포구 윤중로 일대에서 열리는 제13회 영등포 여의도봄꽃축제(4월 1~9일)도 ‘벚꽃 비’를 맞으며 걷기 좋은 곳이다. 밤에 벚꽃을 구경하고 싶다면 대구로 가면 된다. 대구 달서구에서 이월드 별빛벚꽃축제(3월 25일~4월 9일)가 열려서다. 인근 경북 경주시에서는 제1회 ‘경주벚꽃축제(3월 31일~4월 9일)’가 열리고 있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의 벚꽃길이 특히 유명하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서는 제21회 청풍호벚꽃축제(4월 5~16일)가 열린다. 전북 정읍(4월 7~12일), 대전 대덕구(4월 7~9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일원(4월 7~9일) 등에서도 벚꽃축제가 열린다.

진해=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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