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관리비 3억 빼돌린 아파트 경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업무를 했던 김모(46·여)씨는 2011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100여 차례 각종 경비를 청구했다. 지출결의서와 출금청구서에 금액을 적어 관리소 결재를 받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은행 서 예금을 인출할 때 금액 앞에 숫자 ‘1’을 붙여 인출금을 부풀렸다.

정부 부패척결단, 9040개 단지 점검 #관리소장, 재활용품 수익 챙기기도 #비리 3435건 … 부실감사도 1800곳

이런 식으로 빼돌린 관리비가 2억7000만원이었다. 횡령한 돈은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썼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청주시가 아파트 관리비 실태조사를 시작하자 종적을 감췄다. 그는 지난 1월 인천의 한 식당에서 경찰에 붙잡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국무조정실 산하 정부합동부패척결추진단은 국토교통부·지방자치단체·한국공인회계사회 등과 합동으로 아파트 관리비 비리 실태를 점검한 결과를 6일 공개했다.

지자체가 비리가 의심되는 아파트 단지를 감사한 결과 713곳에서 3435건을 적발했다. 충남 당진의 한 아파트에선 입주자대표회의 총무가 18개월간 운영경비 명목으로 1080만원(월 60만원)을 받았다. 업무 관련 지출로 처리했지만 이를 입증할 영수증이나 장부는 없었다. 부산시 사하구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은 5년 동안 광고 전단·재활용품 수익 약 8000만원을 장부에 반영하지 않았다. 소장은 이를 인출해 무단 사용했다가 적발됐다.

아파트 단지 회계에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추진단에 따르면 2015년 외부기관 회계감사를 받은 전국 300가구 이상 아파트 9040개 단지 중 676곳(7.5%)이 ‘부적합’(외부감사인의 한정·부적정·의견거절) 판정을 받았다. 추진단은 부적합 판정을 받은 676곳 중 자료를 입수한 592개 단지를 분석해 1393건을 적발했다. 자산·부채·수익·비용·장기수선충당금 등을 과대·과소 계상한 경우가 53.9%였다. 영수증 같은 증빙자료를 누락한 경우도 12.7%로 나타났다.

부적합 판정 비율은 2014년(19.4%)보다 11.9%포인트 감소하긴 했지만 ‘적합(적정)’을 받았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회계감사 자체가 부실하게 이뤄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회가 감사 품질이 떨어질 것으로 의심되는 3349개 단지를 골라 점검한 결과 1800곳(53.7%)이 부실 감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실 감사 유형은 공사계약 검토 소홀(35.9%), 장기수선충당금 부과 검토 소홀(28%), 감사업무 미참여(16.2%) 순이었다. 대구시 수성구의 한 회계사는 같은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 5명과 6개월 동안 192개 아파트 단지를 감사했다. 1개 단지 평균 감사일이 0.66일(영업일 기준) 꼴이었다.

공인회계사회는 부실 감사 재발을 막기 위해 감사인(회계법인 등) 15곳과 회계사 65명에게 주의·경고 등을 했다. 아파트 단지의 회계감사보고서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전국 아파트 관리비는 연간 12조원 규모다. 관리비 비리는 2014년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폭로하면서 공론화됐다. 이후 정부는 3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에 대한 외부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등 관련 법을 개정했다.

김종학 국토부 주택건설공급과장은 “‘사각지대’로 꼽히는 오피스텔이나 다른 복합주택에 대해서도 외부 회계감사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숫자 맞추기식 외부 회계감사로는 비리를 감시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입주자가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에서 감사보고서를 열람하는 등 아파트 자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