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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 청구서에 '1' 추가해 2억7000여만원 '꿀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로 일하던 김모(46ㆍ여)씨는 2011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100여 차례에 걸쳐 관리소에 각종 경비를 청구했다. 지출결의서ㆍ예금청구서 왼쪽에 여백을 두고 금액을 적어 관리소 결재를 받았다. 그리고는 은행에 예금을 청구할 때 금액 앞에 숫자 ‘1’을 붙여 인출금을 부풀려 받는 식으로 관리비 2억7000만원을 빼돌렸다. 횡령한 돈은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썼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청주시가 아파트 관리비 실태조사를 시작하자 사직서도 내지 않고 종적을 감췄다. 결국 그는 지난 1월 인천의 한 식당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검찰은 김씨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아파트 관리비 감사 결과 87%에서 비리 적발 #회계사는 감사에 '0.66일' #www.k-apt.go.kr에 감사보고서 공개 #"입주자대표회의가 아파트 관리 적극 참여해야"

국무조정실 산하 정부 합동 부패척결 추진단이 국토교통부ㆍ지방자치단체ㆍ한국공인회계사회 등과 합동으로 아파트 관리비 비리 실태를 점검해 적발한 사례다. 추진단이 6일 발표한 점검 결과에 따르면 관리사무소가 주민이 낸 관리비를 중간에서 빼돌리거나 자료를 누락하는 등 회계 부정을 저지른 사례가 대거 적발됐다. 박순철 추진단 부단장은 “아파트 관리비 비리는 물론 외부 회계감사 부실도 다수 적발됐다. 비리 연루자를 사법 처리하고 책임 있는 감사인ㆍ회계사를 징계 조치했다”고 말했다.

발표에 따르면 2015년 외부기관 회계감사를 받은 전국 300세대 이상 아파트 9040개 단지 중 676개(7.5%)가 ‘부적합’(외부감사인의 한정ㆍ부적정ㆍ의견거절) 판정을 받았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모든 아파트가 관리비를 고의로 횡령하려고 증빙서류를 남기지 않았거나 회계 처리를 누락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관리비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전국 아파트 관리비는 연간 12조원 규모다.

아파트관리비적정단지현황

아파트관리비적정단지현황

그나마 이번 부적합 판정 비율은 2014년(19.4%)보다 11.9% 포인트 감소해 아파트 재정 관리가 다소 투명해진 셈이다.


이번 조사에서 지자체가 비리가 의심되는 816개 단지를 감사한 결과 713개(87.4%)에서 3435건의 비리가 적발됐다. 구체적으로 자산ㆍ부채ㆍ수익ㆍ비용ㆍ장기수선충당금 등을 과대ㆍ과소 계상한 경우가 53.9%로 나타났다. 영수증 같은 증빙자료를 누락한 경우도 12.7%였다.

충남 당진의 한 아파트에선 입주자대표회의 총무가 매달 운영 경비 60만원씩 총 1080만원을 개인 통장으로 받았다. 업무 관련 지출로 처리했지만 영수증ㆍ장부를 누락했다. 부산 사하구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은 5년 동안 광고 전단지·재활용품 수익 약 8000만원을 장부에 반영하지 않고 현금으로 인출하는 등 무단 사용했다가 적발됐다. 인천 서구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승강기 등 대규모 수선에 대비한 장기수선충당금을 46억원(㎡당 436원) 적립해야 하는데도 7억원만 적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자체감사결과

지자체감사결과

이를 외부에서 감독할 책임이 있는 회계법인은 ‘부실 감사’를 했다. 공인회계사회가 감사 품질이 떨어질 것으로 의심되는 3349개 단지를 골라 점검한 결과 1800개(53.7%)가 부실 감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실 감사 유형은 공사계약 검토 소홀(35.9%), 장기수선충당금 부과 검토 소홀(28%), 감사 업무 미참여(16.2%) 순이었다. 대구 수성구의 한 회계사는 같은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 5명과 6개월 동안 192개 아파트 단지를 감사했다. 1개 단지 평균 감사일이 0.66일(영업일 기준) 꼴이었다.

공인회계사회는 부실 감사 재발을 막기 위해 감사인(회계법인 등) 15곳과 회계사 65명을 주의ㆍ경고 등 징계했다.

감사 보고서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아파트 관리 비리는 2014년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폭로하면서 공론화됐다. 이후 정부는 3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에 대한 외부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는 등 관련 법을 개정했다.

추진단은 관리비 비리를 막기 위해 ①외부 회계감사→②(외부회계감사 결과, 민원 등 기초로 한) 지자체 감사→③(범죄 혐의가 있는 경우) 사법기관 수사로 이어지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종학 국토부 주택건설공급과장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만 보고했던 외부 회계감사 결과를 지자체에 의무 보고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사각 지대’로 꼽히는 오피스텔이나 다른 복합 주택에 대해서도 외부 회계감사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권대중 명지대(부동산학) 교수는 “숫자 맞추기식 외부 회계감사로는 비리를 감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에서 감사보고서를 열람하는 등 주민 자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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