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신 마비 지휘자, 휠체어 합창단원과 인생 2악장 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4.0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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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상일 단장, 사고 딛고 재기 … 해외서 공연 러브콜 

2013년 11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정상일 세한대 실용음악학과 교수는 30년을 서왔던 오케스트라 무대가 낯설게 느껴졌다. 1년 전 11층 난간에서 떨어져 하반신 마비가 된 뒤 처음 잡아보는 지휘봉이었기 때문이다. 첫 곡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휠체어를 타고 무대 앞에선 정 교수는 손짓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정 교수의 역동적인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정은 35개의 악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뜨거웠다.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휠체어 탄 기적의 지휘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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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세한대 실용음악학과 정상일 교수. 장애를 극복한 그는 휠체어 장애인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세한대 실용음악학과 정상일교수. 장애를 극복한 그는 휠체어 장애인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처음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죠.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지휘봉을 다시 잡는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 그러나 정 교수를 다시 일으킨 건 그의 아내와 두 딸, 동료 교수들이었다. “다시 무대에 서보라는 이야기를 수백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냈죠.”

하지만 이전처럼 두 다리에 체중을 실어가며 역동적인 지휘를 할 순 없었다. 또 휠체어에 앉아선 악보를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악보를 모두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개별 악기가 들어가고 나올 부분까지 모두 머리에 넣었죠.”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세한대 실용음악학과 정상일 교수. 장애를 극복한 그는 휠체어 장애인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우상조 기자]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세한대 실용음악학과 정상일교수. 장애를 극복한 그는 휠체어 장애인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우상조 기자]

다시 지휘봉을 잡은 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의 첫 복귀작인 ‘피가로의 결혼’ 서곡처럼 마치 인생의 2막이 새롭게 열리는 느낌이었다. 2014년 그는 자신의 영문 이름 이니셜을 딴 ‘CSI 오케스트라단’을 창단했다.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넘기 위해 해금과 거문고, 단소 등 국악기부터 드럼과 기타, 색소폰 등 대중악기를 클래식 악기들과 협연했다.

그가 본격적인 ‘휠체어를 탄 기적의 지휘자’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2016년 2월 ‘대한민국 휠체어합창단’을 만들고 나서부터다. 정 교수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대규모 합창단은 우리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50명의 휠체어 장애인들이 합창 무대에 처음 올랐다.

사고 이전에 이미 세계 20여 개 국가의 무대에서 명지휘자로 활동했던 그의 재기 소식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초청장을 보냈다. 지난해 7월 그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단은 클래식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 빈에 초청됐다. 지난 1월엔 이탈리아 로마에서 공연했고 올 7월엔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의 다음 목표는 평창올림픽이다. 패럴림픽 개막식 때 그의 합창단원 100명이 휠체어를 타고 애국가를 함께 부르는 것이다.

글=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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