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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받은 도움, 갚고 싶어"…전재산 기부하고 요양병원 간 김복녀 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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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곳의 전세금 3000만원과 OO은행 통장에 저금돼 있는 현금 모두를 기부합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뜻 깊게 사용해 주세요. 2015년 10월 10일 김복녀.'

2015년 10월 김복녀(87) 할머니가 홀로 집에서 쓴 유언장 내용 중 일부다. 김 할머니는 이 유언장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처음으로 친한 주민센터 직원에게 유언장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이 돈을 꼭 좀 좋은데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와줘."

김 할머니는 서울 동대문구 용신동 주민센터 직원들의 도움으로 반지하 집 보증금 3000만원과 통장예금 2000여만원을 사랑의 열매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 기부는 지난 2월 김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이후 남은 생활을 요양병원에서 지내게 되면서 성사됐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인 김 할머니는 병원비와 생활비 등을 국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지난 2월 전재산을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뒤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는 김복녀 할머니. 홍상지 기자

지난 2월 전재산을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뒤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는 김복녀 할머니. 홍상지 기자

5일 한 요양병원에서 김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주름진 두 손으로 손녀뻘인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평소 즐겨 마신다는 자양강장제 한 병도 손에 쥐어줬다. "좋은 일 하셨다고 해서 왔어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김 할머니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 뿐인데,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전쟁통에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형제를 잃고 혼자가 됐다. 이후 평생을 순댓국 장사·폐지 줍기 등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젊었을 적 결혼을 해 아들도 낳았지만 현재는 모두 연락이 끊어진 상태다.

그런 김 할머니에게 힘이 돼 준 건 가족도 아닌, 주변의 이웃들이었다. 이웃들은 연로해 몸이 약해진 김 할머니를 걱정해 수시로 할머니의 집을 찾아왔다. 할머니가 먹기 좋은 반찬이나 국거리를 챙겨주기도 했다. 주민센터에서는 주기적으로 직원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말동무 역할을 했다. 

자신이 이웃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생각하며 김 할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기부를 결심했다. 먹을 것 덜 먹고, 입을 것 덜 입어가며 푼돈을 조금씩 모았다. 김 할머니는 "한평생 가족에게 상처만 받고 살아온 내게 이웃들은 또 다른 가족이었다. 기부를 하고 나니 빚을 갚은 듯 마음이 후련하다"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할머니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이웃 주민인 이춘자 용신동장은 "할머니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도록 앞으로 병원에 자주 찾아갈 생각이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기부를 한 뒤부터 고질병이던 불면증이 나았다고 했다. "마음이 요즘 정말 편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그러면서 김 할머니는 지난해 지역 복지관 직원들의 도움으로 쓴 자서전을 보여줬다. 할머니의 굴곡진 삶이 담긴 자서전의 제목은 『진흙 같았던 삶, 진주 같았던 마음』이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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