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후보가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차림으로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4/05/d5d7ddf6-733f-45f3-a7fa-5c040b0dc2f4.jpg)
안철수 후보가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차림으로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2012년 11월 23일 오후 8시20분 서울 공평동 진심캠프.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는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며 사퇴했다. 그는 “국민에게 드린 (문재인과의) 단일화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고 했다. 눈물이 그렁한 채 4분40초 동안 905자 선언문을 읽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안철수 라이프 스토리 #의대 박사과정 때 컴퓨터 백신 개발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태 때 V3 대박 #청춘콘서트로 ‘안철수 현상’ 불러 #국민의당 창당, 3당체제 만들어내
그날 사퇴선언문에서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뤄지겠지만 저 안철수는 새로운 정치를 갈망합니다. 그것이 어떤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온몸을 던져 계속 그 길을 가겠습니다”고 약속했다. 그러곤 1593일이 지난 2017년 4월 4일. 진짜 안철수의 시간이 시작됐다.
◆피 질색하는 의대생, 컴퓨터서 구원 찾다=안철수는 1962년 2월 26일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영모(87)씨가 49년을 운영한 범천의원 3층에서 자랐다. 철수는 어릴 적 ‘인류를 구하는 과학자’를 꿈꿨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시계·라디오·전축 등 전자제품을 분해해 버려 친척들에게까지 요주의 대상이 됐다. 고3 철수는 원래 지망이던 서울대 공대가 아니라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장남이 가업을 이으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 같았다”는 게 이유였지만 의대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학업을 포기할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82년 하숙집 친구의 애플컴퓨터를 처음 접하면서 인생의 탈출구가 열렸다.
◆컴퓨터 백신 무료 배포하다 안랩 창업=88년 7월 서울대 의대 박사과정일 때 플로피디스크를 통해 감염되는 ‘C브레인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자신의 컴퓨터도 브레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이틀 밤을 매달려 치료법을 개발해 배포했다. 이때부터 7년간 ‘낮엔 의사, 밤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로 백신 무료 배포 일을 계속했다. 91년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유행하자 당시 컴퓨터 통신을 통해 배포한 치료법에 ‘백신Ⅲ’로 명명한 게 V3의 시초다. 서울대 의대 1년 후배인 김미경 교수는 “남편이 PC 백신 개발에 몰두하느라 입영 날짜도 얘기해 주지 않아 함께 입대하는 다른 선배들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군의관에서 제대한 이듬해 안철수는 의사 10년 생활을 접었다. 95년 3월 안철수연구소(안랩의 전신)를 창업했다.

◆ 법륜스님·박경철과 청춘콘서트=안랩 초창기의 삶은 고달팠다. 무상 배포되는 V3를 굳이 돈을 주고 사려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없었다. 99년 4월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태로 전국에서 30만 대 이상 컴퓨터가 일시에 먹통이 된 게 도약의 계기가 됐다. 연 10억~20억원에 머물던 매출이 그해 100억원을 돌파했다.
정치권도 안철수를 주목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 비례대표 의원이나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제안받았지만 고사했다. 대신 2005년 3월 안랩 창립 10주년을 맞아 최고경영자(CEO)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2011년 5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됐다. 그해 5~9월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 법륜 스님과 함께 아픈 청춘을 위로하려 만든 청춘콘서트가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2011년 9월 지지율 50%를 넘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인 그가 지지율 5%에 불과한 박원순 시장에게 후보직을 양보하자 다음 날 그는 대선 지지율 1위 후보로 바뀌었다. 소위 ‘안철수 현상’이었다.

◆“안철수의 시간 시작됐다” 강철수로 변신=안철수는 2012년 9월 19일 “저에게 주어진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려고 한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두 달 뒤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안철수 현상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두 번(서울시장과 대선 출마)의 양보에 빗대 ‘간(간 보는) 철수’ ‘또 철수’라는 비아냥도 들끓었다. 안철수는 대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자기 길을 갔다.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2014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2015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 탈당→2016년 2월 국민의당 창당에 이어 20대 총선에서 3당체제(38석)를 만들어 냈다. 그사이 교과서에까지 등장했던 ‘모범생 철수’는 강(强)철수, 독(毒)철수로 변했다.
정효식 기자 jjp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