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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쓸쓸·시발비용을 아시나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5호 06면

요즘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신조어가 있다. 느닷없이 생긴 행태가 아닌데도 단어로 요약하니 파급력이 크다. 이를테면 ‘스트레스 받고 홧김에 치킨 시키기’‘평소라면 대중교통 이용했을 텐데 짜증나서 택시 타기’를 한 단어로 표현한 말이다. 충동적으로 돈을 썼다는 ‘충동구매’‘지름신 강림’과 유사한데, 미묘한 차이가 있다. 홧김에, 짜증나서와 같은 감정어휘가 들어가 있다. 바로 ‘시발비용’이다.

거친 신조어의 사회학

지난해 말 한 네티즌이 SNS에 이 비용의 정의와 예시를 올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정의에 따르면 ‘시발비용이란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라고 한다. 홧김에 돈 썼다는 소비 행태에 거친 이름이 붙여진 꼴이다. 각종 인증샷과 함께 SNS를 타고 확산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7일 인공지능 기반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가 트위터·블로그 등에서 ‘시발비용’ 언급량을 분석한 결과 홧김에 ‘택시비’를 가장 많이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 것은 음식이었다. 피자ㆍ치킨ㆍ족발을 시키면서 ‘시발비용’을 주로 언급했다. 통상 스트레스 받을 때 먹는다는 달달한 군것질거리나 술과 같은 기호식품과 다른 음식이다.

부주의한 탓에 안 써도 되는 돈을 썼을 때를 일컫는 ‘멍청비용’도 있다. 미리 돈을 안 뽑아 놔서 현금인출기(ATM) 수수료를 냈다던지, 할인받을 수 있는 상품을 제값 주고 샀을 때 쓴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돈 썼다는 ‘쓸쓸비용’도 있다.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친구들에게 밥을 사줬다는 식이다. 외로워서, 멍청해서, 홧김에 쓴 돈이 소소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왜 이런 현상과 신조어가 생겨나는 걸까.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의 저자 건국대 하지현 교수(정신건강의학과)와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사회학과)를 전화로 만났다.

왜 ‘00비용’이 유행할까.
“소비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인간의 심리 기제로 봣을 때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스몰 럭셔리(small luxury)’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길티 플레저의 경우 한밤중에 초콜릿을 먹을 때 죄책감을 느끼면서 즐거울 때 쓴다. 스몰 럭셔리도 나만의 작은 사치를 즐기는 거다. ‘시발비용’ 의 경우 같은 맥락이지만 즐거움이 빠졌다. 공격성이 담겼다. 금지된 것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보다 억압된 것을 터트리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 사회의 내부 압력이 올라간 것 같다.”(하)


“요즘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현재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려는 욕망이 담긴 것 같다. 저축해봤자 집 못 사잖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봤자 평생 다닐 수 있는 것 아니다. 갑-을 관계로 드러나는, 계급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젊은 청년층일수록 스트레스 받을 수밖에 없고 이를 반영한 신조어가 나오는 거다.”(구)  

왜 꼭 돈 쓰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할까.
“소비지향적인 문화트렌드와 연관 있다. SNS에서 먹고 구입한 사진을 올려 과시하며 소통한다. 뒤처지지 않고 싶은 욕구,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어하는 욕구 등 모두 SNS와 연관되어 있다.”(구)


“마찬가지로 SNS상에서 ‘00비용’이 폭발력을 갖게 된 것도 센 단어, 센 말의 조합
이어서 그런 것 같다.”(하)

큰 돈을 낭비한 것도 아닌데 자학하는 느낌도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스펙 관리에 몰두한다. 자기계발, 관리가 중요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와 시간과 생각을 모두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의미를 찾고 관리하려 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내가 한 선택이, 내가 쓴 돈이 바른 것이었느냐는 압박감을 느낀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돌아가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구) ●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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