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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무용

예술을 사랑한 현명한 정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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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인주무용평론가

장인주무용평론가

17세기 프랑스엔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한 왕이 있었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기에 어머니가 섭정을 했고, 그 때문에 춤과 음악에 빠져 살았던 루이 14세다. 최초의 프로 무용수로 꼽힐 만큼 놀라운 실력을 갖추고 매일매일 춤을 단련하던 열다섯 살 때의 어느 날, 그는 춤으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웠다. ‘밤의 발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양으로 장식한 아폴론으로 등장해 멋진 연설 대신 놀라운 춤 실력으로 ‘내가 곧 세상의 중심이고 왕이다’고 선언했다. 1653년 파리 부르봉 궁에서 있었던 일이다.

천상의 예술 발레와 루이 14세

그날 이후로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게 된 루이 14세는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춤을 이용했다. 막대한 국고를 예술에 쏟아부었고, 여흥거리였던 예술은 국정의 핵심이 됐다. 그에게 있어 춤은 힘이자 쾌락이었고, 춤추는 곳은 곧 정치의 장(場)이 됐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개인적 욕망을 뛰어넘는 현명한 정책을 실천했다. 그 결과 왕명의 힘을 업은 춤은 극장예술로 자리 잡게 됐고 왕립무용아카데미를 설립해 천상의 예술, 발레를 탄생시켰다. 예술사를 통틀어 춤과 정치가 가장 이상적으로 하나가 됐던 때일 것이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밤의 발레’에서 아폴론으로 출연한 모습. [사진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RMN)]

프랑스 루이 14세가 ‘밤의 발레’에서 아폴론으로 출연한 모습. [사진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RMN)]

그로부터 4세기가 지난 대한민국의 오늘, 정치와 가까웠던 문화·예술계는 어떤 모습인가. 박근혜 정부 4대 국정기조 중에서 ‘문화융성’을 발견했을 때의 기대는 실망을 넘어 분노로 바뀌었다. 대통령이 참석한 ‘문화의 날’ 행사를 보면서 이벤트성 행사를 예술이라고 포장하는 것이 한심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의 수장이 한 달에 한 번 문화현장을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했다. 루이 14세만큼은 아니더라도 예술을 사랑하는 대통령이기를 바랐고, 짧게나마 프랑스 유학 경험도 있는 여성 대통령이기에 언젠가는 프랑스의 문화정책을 반영한 ‘문화 민주화’를 실천하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가졌다. 그러나 국정 농단과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오히려 예술과 문화는 초토화됐다.

차기 대선주자들은 이를 복원하겠다고 문화·예술정책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앞세우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예산 편성, 심의 절차, 기관 운영, 예술가 권익 보장,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개선안을 담았다.

그런데도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예술을 애호한다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용했던 정치가, 심사의 공정성을 기한다며 직접 심사에 참여해서는 은밀하게 갑질하는 행정가, 공사를 구분 못하는 심사위원, 실력보다는 마당발을 자랑하다가 어쩌다 심사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민원부터 제기하는 로비스트 예술가들이 다시 판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예술계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좌우파 정권과 무관한 좋은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감히 정치가 넘볼 수 없는.

장인주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