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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독고다이” … 욕 먹어도 할 일 한다는 홍키호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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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선 D-38 홍준표 한국당 후보 확정 

홍준표

홍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는 자신의 인생을 ‘독고다이(단독 플레이)’라고 표현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혼자 힘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는 자신감이 담긴 말이다. 그는 “누구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줄을 서는 사람이 아니다”는 말도 자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이나 친이계로는 불리지 않았다.

홍준표 라이프 스토리 #이주영 권유로 ‘판표’ → ‘준표’ 개명 #전기환·박철언 구속 ‘모래시계 검사’ #‘성완종 리스트’ 2심서 무죄 받아

그에게 가난은 한(恨)이었다.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현대조선소 야간 경비원 아버지, 고리 사채로 머리채 잡혔던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8세 때인 1961년 고향인 경남 창녕을 떠나 여섯 식구가 대구 신천동 단칸 월세방에서 구호물자인 강냉이죽을 먹고 살았다. 그가 6학년이 되던 해 작은누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직물공장에 들어가야 했다. 홍 후보는 2010년 펴낸 자서전 『변방』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가족이 (대구에서) 창녕으로 또다시 이사하자 마을 사람들은 서커스 단원이 온 줄 알고 식구들을 원숭이 구경하듯 놀렸다”고 적었다.

영남고를 나온 그는 처음엔 육사에 합격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조사받는 일이 벌어지자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육사를 그만두고 1972년 고려대 행정학과에 합격했으나 고시패스까진 10년이 걸렸다. 고시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판도 전전했다.

초임지였던 청주지검에서 그는 홍판표(判杓)에서 법 준(準)자를 써서 홍준표로 개명했다. 당시 청주지법 판사였던 자유한국당 이주영(5선) 의원이 권유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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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시절 그는 스타였다. 88년 서울 남부지청 특수부 시절 노량진수산시장 강탈 사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씨를 구속시켰다. 92년 김영삼 정부 시절엔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근무하며 슬롯머신 업계 대부 정덕진씨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5공 실세 박철언 전 의원 등을 구속했다. 하지만 그는 “검사 11년 동안 나는 철저하게 비주류였다”고 말한다. 남은 건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한 편뿐이었다. 검찰을 그만둘 때 그는 ‘모래시계 검사’로 불렸다.

그는 96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요청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 송파갑 공천을 받은 그는 초선의원 시절 DJ 저격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99년 말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잃었다.

하지만 곧 2001년 16대 때 동대문을 보궐선거에서 ‘모래시계 검사’ 이미지를 앞세워 재기에 성공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 소속 출마자들이 줄줄이 떨어진 와중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와 가까운 윤한홍 의원은 “권력에 정면 대항하는 이미지가 서민층에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체급을 한 단계 올린 건 2008년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인 그해 5월 추대 형식으로 원내대표로 뽑혔다.

2010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도전했으나 안상수 후보에 이어 2위를 했다. 다음해 안 대표가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대표직을 승계했다. 변방에서 당 주류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참패하면서 대표직은 단명으로 끝났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민병두 의원에게 패해 낙선했다.

위기를 맞은 듯했으나 두 번째 보궐선거가 그를 살렸다. 2012년 김두관 당시 경남지사가 민주당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하면서 사퇴하는 바람에 생긴 보궐선거에서 그는 기사회생했다. 도지사 취임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취임 70일 만에 진주의료원을 폐쇄했다. 강성노조로 수익성이 악화돼 도민의 혈세를 계속 투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무상급식 지원도 중단했다. 대신 다른 복지예산을 늘렸다. 결국 진보진영에서 ‘주민소환’에 나섰다가 대법원이 청구를 각하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이 와중에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서 정치생명이 끝나는 듯했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욕을 먹더라도 할 일은 한다. ‘욕 먹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논쟁적 인간형’이다.

박성훈 기자 park.seong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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