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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으로] 인간과 기계의 융합, 인간중심주의에 카운터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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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SF액션 ‘공각기동대’의 철학  

두뇌까지 기계화된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 뇌, 몸은 기계, 컴퓨터에 의존 #제3의 존재 “난 모의 인격” 갈등 #미래 인류의 정체성에 의문 제기 #인간서 출발해 기계로 가는 사이보그 #기계서 출발해 인간으로 가는 AI #둘이 합쳐 지금껏 없던 존재 탄생 #“인간과 AI 통합은 최후 선택일수도”

1995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이며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공각기동대’가 22년 만에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그간 숱하게 회자되며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사이보그라는 매혹적 소재와 현란한 과학기술 때문만은 아닐 터. 작품에 흐르는 묵직한 사유는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든 질문의 연속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식론부터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 그럼에도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기대와 두려움까지 작품은 관객을 철학적 심연 속으로 몰고 간다. 원작에 등장하는 명대사와 함께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애초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쿠사나기.

‘공각기동대’가 제시하는 2029년 미래의 주요 특징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성이다. 그건 인간의 뇌와 컴퓨터가 직접 연결되는 ‘전뇌화(電腦化)’로 요약된다.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 스틸 Ghost in the Shell from Paramount Pictures and DreamWorks Pictures in theaters March 31, 2017. [사진=파라마운트 픽쳐스]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 스틸 Ghost in the Shell from Paramount Pictures and DreamWorks Pictures in theaters March 31, 2017. [사진=파라마운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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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의 목 뒤쪽엔 네 개의 접속 단자가 있다. 여기에 코드를 꽂으면 쿠사나기 뇌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시각화되고,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의해 입력되는 정보는 쿠사나기 뇌 속에서 가공된다.

컴퓨터가 기억까지 이식할 수 있기에 자연스레 정체성 혼란의 문제가 생겨난다. 청소부로 등장하는 한 인물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아내도 없다. 하지만 컴퓨터는 그를 이용하기 위해 가짜 기억을 주입한다. 청소부는 자신의 ‘현실’을 모른 채 가짜 추억에 젖어 산다. “존재하는 모든 정보는 현실인 동시에 환상”인 셈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여준 ‘인간 vs 사이보그’라는 이분법적 사고마저 ‘공각기동대’에선 그 경계가 무너진다”고 분석한다.

쿠사나기는 자신에 관해 묻는다. 그는 인간의 뇌를 일부 갖고 있지만 컴퓨터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신체는 아예 기계로부터 빌려왔다. "당신은 어디까지가 오리지널이야?”라고 동료에게 묻곤 "지금의 난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닌가 싶어”라고 토로한다. 내면적 갈등의 소용돌이는 쿠사나기가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상징화된다. 강물에 뛰어든 그는 마치 자유 낙하하듯 내려갔다가 다시 떠오를 때 물 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인간적 나’(물 속의 쿠사나기)와 ‘사이보그적 나’(물 위의 쿠사나기)가 공존한다는 은유다.

이는 현대인의 평범한 일상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인물 A’가 ‘회사 B’에 다닌다고 치자. 지금 A의 굽신거리는 행태는 A의 독자적 결정인가, B의 영향으로 나온 결과물인가. 정수연 한양대 겸임교수는 "다중인격과 같은 정신병리가 아니라 해도 현대인은 ‘내 안의 여러 자아’를 인지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걸 ‘공각기동대’가 SF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인형사.

정체성 혼란에서 그쳤다면 ‘공각기동대’는 범작에 머물렀을 것이다. 작품은 ‘인형사’를 등장시켜 더 큰 혼돈의 세계로 잠입한다.

인형사는 한마디로 인공지능(AI)이다. 처음엔 통제가능한 물질이었으나 온갖 네트워크를 누비는 사이에 스스로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쿠사나기가 인간에서 출발해 기계로 이동해 간다면, 인형사는 기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수렴하는 존재인 셈이다.

1995년 극장판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철학적 스토리와 시적인 비주얼로 SF의 한 획을 그었다.

1995년 극장판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철학적스토리와 시적인 비주얼로 SF의 한 획을 그었다.

아무리 학습능력이 뛰어나 봤자 인공지능이란 스스로 결정권이 없는 기계 덩어리 아닌가. 인간들은 "너는 한낱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인형사는 냉소한다. "인간의 DNA라는 것도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종속 기계로 간주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러곤 이렇게 쏘아붙인다. "생명이라는 것도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하나의 돌연변이일 뿐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듯 "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축은 두 가지다. 주체성(나)과 절대적 이성주의(생각한다)이다. 이런 근대성에 반발하며 탄생한 게 후기 구조주의 철학이다. 60년대 롤랑 바르트의 "작가는 죽었다”는 선언은 결국 주체성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건 또한 인간성에 기초해 보편적 진리의 탐구가 가능하다고 믿는 휴머니즘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었다. 성기완 계원예술대 교수는 "결국 ‘공각기동대’는 끊임없이 ‘주체성’에 의심을 던지며 ‘해체주의’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해 냈다”고 전했다.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90년대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기술 테크노피아에 대한 환상을 깨면서 인간중심주의에 균열을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네트워크는 방대하거든”-제3의 존재.

‘공각기동대’ 이전까지, 아니 그 후에도 미래사회를 예언하는 상당수 콘텐트의 결말은 둘 중 하나다. 암울(디스토피아)하거나 행복(유토피아)하다. 인간과 기계의 대립 속에 인류의 생존 여부에만 초점을 맞췄다. 반면 ‘공각기동대’는 낡은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뜻밖의 메시지를 던진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요구한다. "융합하고 싶다”고. "그것만이 완전한 통일”이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둘은 하나가 된다. 인간과 사이보그 경계선에 있던 둘이 합쳐 지금껏 없던 ‘제3의 존재’로 다시 생환하는 것이다.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 존재 앞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작품은 그저 "사이버 스페이스는 무궁무진하다”고만 암시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인공지능 세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성기완 교수는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이 ‘2류 존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각기동대’의 예언처럼 AI와 인간의 통합은 최후의 선택일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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