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기자의 心스틸러] "이 구역 미친 년은 나야" 외친 김원해

중앙일보

입력 2017.03.28 11:32

업데이트 2017.10.13 17:17

흔히들 장면을 훔치는 사람을 두고 ‘신스틸러’라 칭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와 주연보다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며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여기 그보다 한 수 위인 ‘심(心)스틸러’들이 있다. 한 번 눈길을 주고 나면 마음까지 빼앗아가 버리는 이들의 매력을 집중해부한다.  

JTBC '힘쎈여자 도봉순' KBS '김과장'
오가며 미친 존재감 선사하는 명품 연기
류승룡과 '난타' 초연, 올해로 26년차
액션ㆍ코믹ㆍ휴먼드라마 안되는 게 없네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괴력녀 도봉순에게 맞아 김광복의 이빨이 날아가고 있는 모습. [사진 JTBC]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괴력녀 도봉순에게 맞아 김광복의 이빨이 날아가고 있는 모습. [사진 JTBC]

이쯤 되면 ‘올해의 발견’이다. JTBC 금토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용역업체 백탁파의 넘버 쓰리 김광복 역할로 분하고 있는 김원해(46)가 소위 말하는 ‘미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것. 말 그대로 그는 박보영, 박형식, 지수를 잇는 타이틀 롤도 아니요, 백탁파에서도 임원희, 김민교 다음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1회에서 도봉순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몽땅 나가는 바람에 대사는커녕 병실에 앉아 두부만 먹는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그가 출연하는 신을 보기 위해 목을 빼고 기다린다. 대체 이 배우의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올해로 데뷔 26년 차를 맞은 김원해는 연극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후 1991년 뮤지컬 ‘철부지들’로 데뷔 이후 97년 ‘난타’에 발탁돼 꼬박 10년을 보냈다. 류승룡, 장혁진, 서추자 등과 함께 요리사 복장을 하고 칼을 신명나게 잡고 있는 오리지널 포스터의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바로 그 초연 멤버다. 2008년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로 젊은 연극인상을 받는 등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그렇게 연기 한 길만 보고 달려왔건만 쌓이는 게 없어 김밥집으로 외도했던 그의 사연은 가슴 아프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덕분에 한층 농익은 연기를 선보이게 됐다.

2015년 1월 '난타' 천만 관객 돌파를 맞아 초연 배우들이 당시 포즈를 재연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혁진, 류승룡, 서추자, 김원해. [중앙포토]

2015년 1월 '난타' 천만 관객 돌파를 맞아 초연 배우들이 당시 포즈를 재연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혁진, 류승룡, 서추자, 김원해. [중앙포토]

2014년 감초 역할로 출연한 영화 ‘명량’(1761만)과 ‘해적’(866만)이 잇따라 대박이 터지면서 그를 찾는 곳도 많아졌다. 지난해 tvN ‘시그널’에서 동네 건달들에게 뒷돈을 받다 강등된 장기미제 전담팀의 김계철 형사 역할과 ‘혼술남녀’에서 입만 열면 “수업준비나 하라”고 구박하는 공무원시험학원 원장 역할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는 이제 TV만 틀면 월화수목금토일 만날 수 있을 만큼 대세로 떠올랐다. 최근 종영한 KBS2 월화드라마 ‘화랑’과 tvN 금토드라마 ‘내일 그대와’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시청률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도봉순’과 KBS2 수목드라마 ‘김과장’이 남아있다.

백탁파 김광복(위)과 게이 팀장 오돌뼈 등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는 배우 김원해. [사진 JTBC]

백탁파 김광복(위)과 게이 팀장 오돌뼈 등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는 배우 김원해. [사진 JTBC]

이처럼 오랫동안 쌓아온 내공은 역대급 1인 2역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도봉순’에서 그가 맡은 김광복 역과 도플갱어로 등장하는 오돌뼈 팀장 역은 웬만한 구력이 아니면 도전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괴력녀 봉순이를 이겨보고자 연장을 썼다가 역공을 당해 온몸에 미이라처럼 붕대를 감고 병원에 누워있다가 다시금 “우리 딸 칼로 찌른 놈이 누구냐”고 쫓아오는 심혜진을 보고 사시나무 떨듯 떠는 모습과 짙은 아이라인에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채 짝사랑하는 안민혁 대표를 위해 봉순을 견제하는 게이 팀장의 모습을 어찌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으랴. 그는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야! 너 내가 충고하는데 나대지마라”고 경고했지만, 그가 극 안에서 팔딱팔딱 뛰어놀수록 시청자들은 즐거워진다. 벌써부터 “공로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출연료 두 배로 줘라”는 네티즌들의 평이 잇따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김광복은 도봉순의 시놉시스에 없는 배우였다. 연출을 맡은 이형민 PD는 “제가 예전부터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한 번도 일을 안해 봤다. 영화 ‘아수라’가 워낙 잘되서 캐스팅이 안되겠구나 싶었는데 인연이 됐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대본을 보며 이빨 에피소드가 너무 재미있어서 키운 역할인 만큼 홈페이지 상에 뒤늦게 추가된 오동병 팀장 역 역시 현장에서 이야기하다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과장'에서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추남호 부장 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배우 김원해. [사진 KBS]

'김과장'에서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추남호 부장 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배우 김원해. [사진 KBS]

덕분에 여러 번 깔깔대고 웃었지만 진짜 마음을 뺏긴 건 ‘김과장’에서 맡은 추남호 부장의 쪼그려 앉아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멀리 딸과 부인을 유학 보내놓고 혼자서 한국 집을 지키는 기러기 아빠인 그는 종종 혼자 술을 마신다. 그러다 김과장을 룸메이트로 맞이한 뒤 함께 2층 다락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아침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일들을 가까이 있는 또 다른 식구에게 베푸는 것이다.

추부장은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보듬는다. 김과장처럼 “다과 중에 엿이 있네, 이사님 엿먹어”라고 똘끼있게 내지르진 못하지만 “사람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 조금만 버티자”고 경리부 직원들을 다독인다. ‘1번 버티기, 2번 더 버티기, 3번 죽어도 버티기’는 짐짓 비굴해 보이지만 우리 역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때로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전혀 안 그런 것처럼 연기하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울려 퍼지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가일지도 모른다. 부디 더 많은 작품에서 심금을 울려주시길.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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