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강타한 한국 사회에 정말 기막힌 타이밍으로 도착한 영화가 있다. 지금 놓쳐서는 안 될 이야기, ‘히든 피겨스’(원제 Hidden Figures, 3월 23일 개봉, 데오도르 멜피 감독)다. 백인 남성 엘리트 그룹으로 생각됐던 1960년대 NASA(미국 항공우주국)에 사실 흑인 여성 수학자와 과학자 그룹이 있었고, 이들이 우주 탐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미 많은 유명 인사가 격찬한 작품으로, 지난해 말 미셸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시사회를 열어 “놀랄 만하고 중요한 작품”이라 추켜세웠다. 달 착륙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던 흑인 여성들의 유리 천장 뚫기. 그 기적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히든 피겨스’의 시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62년 미국 남부는 “냉전, 우주 개발 전쟁, 짐 크로우 법, 인권 운동이 모두 충돌한 격동의 시대”(데오도르 멜피 감독)였다. 바야흐로 미국과 소련의 우주 전쟁이 꽃을 피웠던 시대.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1934~1968)을 지구 상공 위로 먼저 쏘아 올린 소련에 맞서,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이 NASA를 한창 닦달하던 때였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NASA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줬다. 여기서 잠깐, 이 시대에 크나큰 장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백인과 유색인을 분리하는 ‘짐 크로우 법’이었다. 식당·화장실·극장·버스 등 각종 시설마다 백인 전용과 유색인 전용으로 나눠 흑인을 대놓고 멸시했다. 80년 넘게 이 악법 속에 차별받아야 했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1929~1968) 같은 선구자를 따라 점점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 갔다.
‘히든 피겨스’는 이런 차별과 폭력의 시대에 오로지 능력으로 NASA에 입성한 흑인 여성들을 조명한다. 흔히 ‘우주 탐사’ 하면 닐 암스트롱(1930~2012)이나 존 글렌(1921~2016) 같은 백인 남성 우주비행사를 떠올리겠지만, 그 뒤에는 ‘흑인 컴퓨터(Colored Computer)’라 불린 20여 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 그룹이 있었다. 비행 궤도나 착륙 지점을 손수 계산하던 ‘인간 컴퓨터’ 말이다.
여성이 발굴하고, 여성이 만들었다
과연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누가 발굴했을까. 에세이 『히든 피겨스』(동아엠앤비)의 저자이자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인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다. 미국 버지니아주(州) 출신으로 아버지가 NASA 직원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통해 캐서린 존슨을 알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셰털리 작가는 ‘여성 컴퓨터’ 역사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사람들을 만나 폭넓은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컴퓨터 능력은 요즘 토스터보다 못했다. 그래도 인간을 우주로 보낼 수 있었던 건 이 여성들의 계산 능력 때문이었다. 특히 흑인 여성들은 ‘2등 시민’이라는 지위에도 언제나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셰털리 작가는 무엇보다 이들의 자매애에 감동받았다. “150%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서로 지지하고 격려했다. 미래의 흑인 여성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흔치 않은 기회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퍼렐 윌리엄스가 제작자 및 음악감독으로 합류하고, 오스카 수상자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도로시 역에 캐스팅되면서 ‘히든 피겨스’의 발사체는 추진력을 갖기 시작한다. 이 극적인 드라마를 그릴 수 있는 연출자로 제작자들이 택한 이는 멜피 감독이었다. 빌 머레이 주연의 뭉클한 코미디영화 ‘세인트 빈센트’(2014)를 연출했다. 두 딸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이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홈커밍’(7월 개봉 예정, 존 왓츠 감독)도 포기했다. “딸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물’ 혹은 ‘숫자’라는 중의적 뜻을 품은 단어 ‘피겨(Figure)’가 포함된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닌 인위적 ‘숫자’로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우주 경쟁의 판도를 바꾼 ‘숨겨진 인물들(히든 피겨스)’이었다.”
완벽하게 되살린 1960년대
멜피 감독은 영화 속 인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 존슨에게 조언을 듣고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NASA 연구 센터 구조나 우주선 디테일은 NASA의 수석 역사학자 빌 배리에게 검토 받았다. 제작진에게 무엇보다 큰 도전은 수학이었다. 수학이 전면에 등장하는 만큼 방정식 하나라도 잘못 나가면 큰일이었다. 제작진은 수학과 교수를 초빙해 배우들에게 일대일 과외를 시켰다. ‘수포자(수학 포기자)’에 가까웠던 캐서린 역의 타라지 P 헨슨은 까다로운 방정식 풀이에 매달리며 ‘수학 능력자’로 거듭났다.
‘히든 피겨스’의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의상도 한몫했다. 배우들은 풍성한 볼륨의 헤어스타일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하이힐을 신은 채 당당하게 걸었다. 의상감독 르네 에를리히 칼퍼스는 ‘거들의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코르셋을 입혔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격식을 차린 1960년대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시켰다. 배우들 역시 리드미컬한 연기로 보답했다.
‘히든 피겨스’는 그동안 많이 보아 온 ‘흑인 수난사’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피해자가 아닌 ‘인권 쟁취자들의 승리사’다.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한 ‘히든 피겨스’가 반갑고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이십세기폭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