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히든피겨스', NASA의 숨은 영웅? 세 흑인 여성!

중앙일보

입력 2017.03.23 00:00

페미니즘이 강타한 한국 사회에 정말 기막힌 타이밍으로 도착한 영화가 있다. 지금 놓쳐서는 안 될 이야기, ‘히든 피겨스’(원제 Hidden Figures, 3월 23일 개봉, 데오도르 멜피 감독)다. 백인 남성 엘리트 그룹으로 생각됐던 1960년대 NASA(미국 항공우주국)에 사실 흑인 여성 수학자와 과학자 그룹이 있었고, 이들이 우주 탐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미 많은 유명 인사가 격찬한 작품으로, 지난해 말 미셸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시사회를 열어 “놀랄 만하고 중요한 작품”이라 추켜세웠다. 달 착륙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던 흑인 여성들의 유리 천장 뚫기. 그 기적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히든 피겨스 / 사진=영화사제공

히든 피겨스 / 사진=영화사제공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히든 피겨스’의 시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62년 미국 남부는 “냉전, 우주 개발 전쟁, 짐 크로우 법, 인권 운동이 모두 충돌한 격동의 시대”(데오도르 멜피 감독)였다. 바야흐로 미국과 소련의 우주 전쟁이 꽃을 피웠던 시대.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1934~1968)을 지구 상공 위로 먼저 쏘아 올린 소련에 맞서,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이 NASA를 한창 닦달하던 때였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NASA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기회를 줬다. 여기서 잠깐, 이 시대에 크나큰 장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백인과 유색인을 분리하는 ‘짐 크로우 법’이었다. 식당·화장실·극장·버스 등 각종 시설마다 백인 전용과 유색인 전용으로 나눠 흑인을 대놓고 멸시했다. 80년 넘게 이 악법 속에 차별받아야 했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1929~1968) 같은 선구자를 따라 점점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 갔다.

‘히든 피겨스’는 이런 차별과 폭력의 시대에 오로지 능력으로 NASA에 입성한 흑인 여성들을 조명한다. 흔히 ‘우주 탐사’ 하면 닐 암스트롱(1930~2012)이나 존 글렌(1921~2016) 같은 백인 남성 우주비행사를 떠올리겠지만, 그 뒤에는 ‘흑인 컴퓨터(Colored Computer)’라 불린 20여 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 그룹이 있었다. 비행 궤도나 착륙 지점을 손수 계산하던 ‘인간 컴퓨터’ 말이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이들 중 낭중지추였던 세 명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천재적인 수학 능력으로 NASA의 가장 중요한 팀 ‘스페이스 태스크 포스 그룹’에 들어간 캐서린 존슨(98), ‘흑인 컴퓨터’ 그룹 리더이자 NASA 유일의 IBM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된 도로시 본(1910~2008),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 메리 잭슨(1921~2005)이다. 세 사람은 백인 여성으로 구성된 ‘백인 컴퓨터’ 그룹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화장실과 식당을 따로 썼다. 스페이스 태스크 포스 그룹에 발령이 난 캐서린 존슨의 경우,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찾아 매일 왕복 1.6㎞를 달렸다. 하지만 세 사람은 좌절하지 않았다. ‘히든 피겨스’는 로켓이 창공을 가르듯 나아가는 여성들을 희망찬 분위기로 스크린에 옮긴다.

여성이 발굴하고, 여성이 만들었다

과연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누가 발굴했을까. 에세이 『히든 피겨스』(동아엠앤비)의 저자이자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인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다. 미국 버지니아주(州) 출신으로 아버지가 NASA 직원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통해 캐서린 존슨을 알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셰털리 작가는 ‘여성 컴퓨터’ 역사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사람들을 만나 폭넓은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컴퓨터 능력은 요즘 토스터보다 못했다. 그래도 인간을 우주로 보낼 수 있었던 건 이 여성들의 계산 능력 때문이었다. 특히 흑인 여성들은 ‘2등 시민’이라는 지위에도 언제나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셰털리 작가는 무엇보다 이들의 자매애에 감동받았다. “150%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서로 지지하고 격려했다. 미래의 흑인 여성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흔치 않은 기회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셰털리 작가의 조사에 촉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영화 제작자 돈나 지글리오티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2008, 스티븐 달드리 감독)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2011, 더글러스 맥그러스 감독) 등을 만든 베테랑 제작자는 에세이가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 “나를 포함해 이 사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정보는 이미 다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업적이 대중에게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지글리오티는 지성과 감성을 갖춘 각색 작가를 찾았고, 여성 작가 앨리슨 슈로더가 낙점됐다. NASA 프로그래머 출신 할머니를 둔 그는 자신도 고등 수학을 공부했고, NASA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NASA가 편견 없이 인재를 고용하는 조직”임을 알았던 슈로더는 시나리오에 NASA의 포용적 태도를 담아냈으며, 여성 과학자들의 우정과 팀워크에 무게중심을 두고 휴머니티와 유머를 채워 넣었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퍼렐 윌리엄스가 제작자 및 음악감독으로 합류하고, 오스카 수상자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도로시 역에 캐스팅되면서 ‘히든 피겨스’의 발사체는 추진력을 갖기 시작한다. 이 극적인 드라마를 그릴 수 있는 연출자로 제작자들이 택한 이는 멜피 감독이었다. 빌 머레이 주연의 뭉클한 코미디영화 ‘세인트 빈센트’(2014)를 연출했다. 두 딸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이 영화를 연출하고 싶어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홈커밍’(7월 개봉 예정, 존 왓츠 감독)도 포기했다. “딸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물’ 혹은 ‘숫자’라는 중의적 뜻을 품은 단어 ‘피겨(Figure)’가 포함된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닌 인위적 ‘숫자’로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우주 경쟁의 판도를 바꾼 ‘숨겨진 인물들(히든 피겨스)’이었다.”

완벽하게 되살린 1960년대

멜피 감독은 영화 속 인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 존슨에게 조언을 듣고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NASA 연구 센터 구조나 우주선 디테일은 NASA의 수석 역사학자 빌 배리에게 검토 받았다. 제작진에게 무엇보다 큰 도전은 수학이었다. 수학이 전면에 등장하는 만큼 방정식 하나라도 잘못 나가면 큰일이었다. 제작진은 수학과 교수를 초빙해 배우들에게 일대일 과외를 시켰다. ‘수포자(수학 포기자)’에 가까웠던 캐서린 역의 타라지 P 헨슨은 까다로운 방정식 풀이에 매달리며 ‘수학 능력자’로 거듭났다.

히든 피겨스 / 사진=영화사제공

히든 피겨스 / 사진=영화사제공

촬영은 할리우드에서도 극히 드물다는 여성 카메라 감독 맨디 워커가 맡았다. 워커 촬영감독은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사진을 많이 찍었던 사진작가 대니 라이언과 고든 파크스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특유의 컬러풀하고 멋진 거리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사울 라이터 작품도 참고했다. 아날로그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 대신 필름으로 촬영한 것도 특징이다. 오래된 파나비전 애너모픽 렌즈와 옛날 코닥 필름으로 찍어 “컬러와 빛의 대비가 아름답고, 따뜻한 감도의 영상”을 뽑아냈다.

‘히든 피겨스’의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의상도 한몫했다. 배우들은 풍성한 볼륨의 헤어스타일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하이힐을 신은 채 당당하게 걸었다. 의상감독 르네 에를리히 칼퍼스는 ‘거들의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배우들에게 코르셋을 입혔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격식을 차린 1960년대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시켰다. 배우들 역시 리드미컬한 연기로 보답했다.

‘히든 피겨스’는 그동안 많이 보아 온 ‘흑인 수난사’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피해자가 아닌 ‘인권 쟁취자들의 승리사’다.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한 ‘히든 피겨스’가 반갑고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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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이십세기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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