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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한증은 몰라도 공안만큼은 믿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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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9월 1일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차전 한국-중국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중국팬들이 오성홍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9월 1일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차전 한국-중국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중국팬들이 오성홍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중앙포토]

장혜수스포츠부 부데스크

장혜수스포츠부 부데스크

“영장류 새끼들은 오직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공포를 타고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추락, 뱀, 어둠이 그 세 가지다. … (중략) … 뱀에 대한 공포는 조상 대대로 포유류의 적수였던 파충류에 대한 공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1934~96)의 78년 퓰리처상 수상작 『에덴의 용,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사이언스북스) 172쪽에 나오는 얘기다. 인간이 뱀을 무서워하는 건 그들의 조상이었던 포유류가 포식자인 파충류에 오랜 기간 쫓기면서 공포가 뇌리에 새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 기반한 주장이다.

스포츠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같은 상대에게 오랜 기간 반복해 지다 보면 공포심이 생긴다. 중국 남자 축구가 한국을 두려워하는 현상, 소위 공한증(恐韓症)이 그 예다. 중국은 한국과 A매치(성인 남자 대표팀 간 경기)에서 1승12무18패의 절대열세다. 최근 대결인 지난해 9월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서울 원정경기에서도 중국은 한국에 2-3으로 졌다. 중국은 오는 23일 한국을 중국 창사로 불러 홈 경기를 치른다. 중국은 대한축구협회가 요청한 전세기 운항을 불허했다.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에 대한 보복이라는 분석이지만 내심 한국 축구대표팀을 피곤하게 만들어 보려는 꼼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공한증을 탈출하려 했다면 오산이다. 진단과 처방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은 외부에 있을지라도 그 원인은 대개 내부에 있다.

사실 한국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과거 한국은 유럽만 만나면 주눅이 들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 0-5 패배,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 0-5 패배, 같은 해 체코 평가전 0-5 패배. 모두 힘 한번 못 써보고 무너졌다. 그랬던 한국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 지독한 공포로부터 탈출했다. 한국은 월드컵 개막 직전 평가전에서 프랑스에 2-3으로 아쉽게 졌고 잉글랜드와는 1-1로 비겼다.

불과 1년 새 극적으로 바뀐 원동력은 무엇일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 덕분이다. 그 전까지 ‘한국 축구=강철 체력’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도입한 과학적 측정법은 그 믿음이 허상이라는 걸 확인시켜줬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심장박동수까지 측정하는 과학적·체계적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한 ‘강철 체력’을 완성했고 유럽 축구 공포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중국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승리가 없다. 2무3패로 6개 팀 중 최하위다. 이번에 한국에 질 경우 본선행 가능성이 ‘희박’에서 ‘전무’로 바뀐다. 두려운 점이 있다. 한국 선수단, 그리고 한국 응원단의 안전 문제다. 사드 문제에다 중국 축구가 벼랑 끝에 선 상황까지 겹쳐 혹여 불상사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부디 이런 두려움과 걱정은 기우이길 바란다. 공한증은 몰라도 공안(公安)만큼은 중국 당국이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할 것이라고 믿는다.

장혜수 스포츠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