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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정당의 몰락, 순식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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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올해 유럽에서 치러지는 3대 선거 중 하나인 네덜란드 총선이 끝났다. 유럽 지도자들은 대서양을 넘나드는 극우 포퓰리즘 파고가 자신들을 덮치지 않을까 걱정해 왔다. 극우 정치인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20석을 얻는 데 그치자 곳곳에서 안도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하지만 유럽에선 마르크 뤼테 총리의 자유민주당(VVD)과 함께 전후 네덜란드 정계를 양분해 온 좌파 노동당(PvdA)이 몰락한 것에 충격을 받고 있다. 유권자의 반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와 함께 기성 정치권에 대한 외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946년 창당한 네덜란드 노동당은 2012년 총선 때 38석을 얻어 VVD에 이은 2당이었다. 이번 총선에선 9석으로, 29석을 잃으며 7위로 밀려났다. 노동당은 뤼테 총리의 VVD와 좌우 연정을 꾸려 지난 5년간 집권여당으로 활동했다. VVD도 지난 총선 대비 8석을 잃었지만 민심의 이반은 노동당에 집중됐다. 현지 언론들은 과거 노동당 지지표가 빌더르스의 자유당(PVV)과 다른 좌파·중도 성향 군소 정당으로 분산된 것으로 분석했다.

노동당의 참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살기 팍팍해진 중산층 이하의 불만이 주 요인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세금을 인상하고 정부 지출을 줄여 대응했다. 부자와 가난한 계층의 격차는 점점 커졌고, 특히 중산층의 가계 소득이 늘어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국가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전 개인이 지불하는 비용이 2008년에 비해 50%가량 인상됐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 과실이 소수 부유층에게만 돌아갔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를 우선해온 노동당이 연정에 참여해 긴축 정책에 동의하자 지지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전통적인 유럽의 복지제도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지켜본 유권자들에게 빌더르스 같은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은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밀려드는 이민자와 세계화가 원흉이라는 얘기에 저학력·저소득층이 먼저 반응한다. 네덜란드의 이민자는 인구의 10% 미만이고 EU 다른 국가들에 비해 중간수준인데도 그렇다. 여기에 유럽뿐 아니라 대부분 국가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류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노동당은 된서리를 맞았다.

네덜란드 주류 좌파의 신세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빌더르스가 주춤했을 뿐 프랑스 대선 등 남은 선거에서 극우 포퓰리즘 후보의 향배가 여전히 주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국 역시 중산층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소비할 여력이 없으며,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해도 계층 간 사다리는 과거에 비해 허물어지고 있다. 국민들의 복지 요구는 높아만 가는데 세금을 올리지도 못하면서 좌우 성향을 불문하고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복지 공약을 남발한다. 이런 정당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30%대를 넘지 못한다. 정치권이 대선에 골몰해 있지만 양극화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면 노동당처럼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