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하얀 커피꽃, 진향 커피향 … 해발 1500m의 베트남 '낙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농장에서 빨갛게 익는 커피 체리를 따는 모습. 보통 2월께 수확이 끝난다.

농장에서 빨갛게 익는 커피 체리를 따는 모습. 보통 2월께 수확이 끝난다.

달랏에는 유럽풍 건물이 많다. 100여 년 전 프랑스인이 지은 빌라를 개조한 아나 만다라 리조트.

달랏에는 유럽풍 건물이 많다. 100여 년 전 프랑스인이 지은 빌라를 개조한 아나 만다라 리조트.

영원한 봄의 도시(City of eternal spring). 베트남 달랏(Da lat)에 대한 여행 정보를 찾으면서 수십 번 만난 수식어다. 실제로 3월 초 달랏을 방문해보니 이 말 만큼 적확한 표현이 없었다. 수국·자카란다·부겐벨리아 등이 만개해 봄 기운이 완연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새하얀 커피꽃이었다. 산등성이를 덮은 커피나무 장관을 넋놓고 바라봤다. 베트남에서도 최고급 아라비카 커피가 나는 달랏. 그곳에서 사흘간 커피 스무 잔을 마시고 커피꽃 향기에 내내 취해 있었다.

달랏에서 고급 아라비카 커피를 책임지는 사람들. 롤랜(왼쪽)과 손

달랏에서 고급 아라비카 커피를 책임지는 사람들. 롤랜(왼쪽)과 손

프랑스가 남긴 유산

프랑스인들이 찾던 휴양지 달랏

지난 2월 27일. 호치민공항에 착륙한 비엣젯항공 VJ863편의 문이 열리는 순간, 에어컨 실외기 바람처럼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섭씨 34도.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달랏공항에 도착하니 밤 공기가 상쾌했다. 섭씨 12도. 가벼운 티셔츠에 바람막이 재킷 차림이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고도계를 보니, 해발 1000m였다. 택시를 타고 달랏 시내로 가니 조금 서늘했다. 해발 1500m. 달랏은 프랑스 사람들 휴양지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을 점령(1884~1945)하기 전부터 중남부를 장악해 ‘코친차이나’를 설립했다. 한데 베트남은 너무 덥고 습했다. 코친차이나의 수도 사이공(호치민)을 피해 찾은 곳이 300㎞ 북동쪽에 있는 달랏이었다. 호화 빌라를 짓고, 철로를 깔았다. 알프스를 만난듯 반가웠을 터. 프랑스인들은 달랏에 커피도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달랏의 기후와 지형이 커피 생산에 적합한 걸 깨닫고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커피나무를 심었다. 베트남은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 커피 수출국이다. 한 해 평균 120만~150만t을 수출한다. 이중 97%가 로부스타종이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보다 맛이 쓰고 카페인이 강하다. 대신 원두 가격이 저렴해서 설탕·프림과 함께 타 먹는 인스턴트 커피로 많이 쓴다. 어르신들이 베트남 여행 다녀오면 꼭 사오는 바로 그 G7 커피! 베트남 최대 커피 생산지는 달랏이 아니라 더 북쪽에 있는 부온 마 투옷(Buon MaThuot)이다. 해발 500~900m에 있는 도시로, 대부분 로부스타 커피를 재배한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보다 낮은 고도에서도 잘자란다. 반면 달랏은 아라비카가 주종을 이룬다. 프랑스 식민 시절부터 소량 생산만 하다가 80년대 들어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전 세계에서 스페셜티 커피가 유행하면서 달랏 커피 농가들도 커피 고급화에 돌입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달랏 커피를 파는 카페가 생기고 있다. 만화 커피 한잔 할까요 스토리작가인 이호준씨는 “베트남 정부가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아라비카 재배가 부쩍 늘었다”며 “아직까지 남미·아프리카산보다 맛과 풍미는 약하지만 의욕적으로 커피 개발에 나선 기업과 농장이 많아 발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3월이면 만개하는 커피꽃.

3월이면 만개하는 커피꽃.


수확부터 로스팅까지 체험

커피의 고장에 왔으니 카페부터 찾았다. 인근 농장을 방문하고 커피 교육을 해주는 일일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카페였다. 오전 8시30분에 찾아간 라 비엣(La viet) 커피는 로스팅 공장과 제법 세련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절반이 백인이었다.

미국인 소냐, 독일인 마르코 그리고 카페 직원 사벳과 함께 4륜구동 차를 타고 랑비앙산(2169m) 남쪽자락에 있는 유기농 커피농장으로 향했다. 침엽수 우거진 숲이 내내 차창에 비쳤다. 20분만에 도착한 농장 입구에는 나무기둥에 ‘Son’s farm’이라 쓰여 있었다. 농장주 손 응우엔 밴(55)이 푸근한 웃음으로 맞아줬다. 사벳이 소개했다. “2005년부터 커피 재배를 시작했어요. 이전까지는 자동차 영업맨으로 이름 좀 날렸대요. 흐흐.”
베트남 전통모자 ‘논’을 쓰고 소쿠리를 둘러멘 뒤 커피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수확 끝물이어서 새빨간 커피 체리는 많지 않았다. 커피 수확은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집중된단다. 30분 동안 눈에 보이는 체리를 닥치는 대로 땄다. 이어 건조장으로 갔다. 직접 딴 열매 껍질을 기계로 벗기고 일일이 손으로 씻는 워싱 작업을 했다. 노동은 아니었다. 맛보기 농장 체험 정도.
잠시 쉬는데 손이 커피를 준비했다. 그는 원두와 물의 양, 드립 시간까지 신중히 재며 한 잔, 한 잔 정성스레 커피를 내렸다. 푸른 커피밭과 주변 산새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신맛과 목구멍을 묵직하게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달고 쓴 베트남 커피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손은 자부심이 강했다.
“커피 맛의 70%는 농장에서 결정됩니다. 열매를 따서 건조시키는 과정까지 모두 손수 할 정도로 각별한 공을 들입니다. 아프리카나 남미산보다 풍미가 약할 수 있지만 바디감 만큼은 뒤지지 않습니다.”
다시 카페로 돌아와 생두 선별, 로스팅 작업을 체험했다. 이어 커피 맛과 향을 감별하는 법을 배웠다. 아라비카 한 종만 마시는 싱글 오리진부터 로부스타와 아라비카를 섞은 블렌딩 등 모두 4종의 커피 맛을 평가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런데도 평가지에 있는 용어와 실제 느낀 맛과 향을 연결하는 건 수학 미적분만큼 어려웠다. 그러니까 매운맛·흙맛·짠맛·과일향·꽃향 정도는 알겠는데 대체 날쌔고(Nippy) 활기차고(Vibrant) 가혹한(Harsh) 맛은 무언지. 소냐와 마르코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각자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씩 만들어 마셨다. 하루 동안 커피를 다섯 잔 이상 마셨더니 머리에서 빙빙 소리가 났다. 짧은 시간, 깊고 심오한 커피의 세계를 너무 많이 배운 걸까.

맛이 달고 진한 베트남 핀 커피.

맛이 달고 진한 베트남 핀 커피.

공정무역 그리고 족제비똥 커피

이튿날 또 다른 농장 ‘커(K’ho) 커피’를 찾았다. 달랏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북서쪽으로 약 10㎞를 갔다. 프랑스풍 가옥이 즐비한 달랏시내와 달리 단층 목조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산골마을에 닿았다. 택시비는 14만동(약 7000원). 인구 5000명에 불과한 소수부족 ‘커족’이 사는 마을이었다. 개들은 늘어져 낮잠을 자고, 돼지는 마을 광장을 뛰어다니고, 닭과 병아리가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론리플래닛 베트남편은 ‘아프리카산 희귀 아라비카종을 재배하는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녹슨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에서 커 커피를 만든 주인공 롤랜을 만났다. 그녀가 물었다. “아침 안 먹었죠? 우리 마을에 괜찮은 국숫집이 있는데 가시죠.” 마을 청년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함께 식당으로 갔다. 한국식 감자탕처럼 돼지등뼈를 넣고 끓인 국수를 먹으며 커피의 역사를 들었다.
“10년 전 달랏에서 가이드를 했어요. 당시 미국 여행사에서 일하던 남편 조쉬를 만났죠. 곧 결혼했고 고향마을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하자고 마음을 모았죠. 산발적으로 재배하던 커피 품질을 높이고 브랜드화 해서 수익 절반을 마을에 환원하는 모델을 만들었어요.”
커족은 1860년대부터 커피를 재배했다. 한 세기 반이 흐른 지금은 롤랜과 조쉬의 노력 덕분에 유서깊은 커 커피가 베트남 각지로, 또 일본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공정무역 커피를 찾는 한국인과도 거래한단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위즐(Weasel) 커피, 즉 족제비똥 커피 농장이었다. 달랏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8㎞ 떨어진 멜린(Melinh)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 가는 길 아카시아 꽃향기가 진동했다. 이내 옅은 눈이라도 내린 듯 온 산자락이 하얗게 덮인 풍경이 펼쳐졌다. 아카시아꽃이 아니라 커피꽃이었다. 해발 1000m. 상대적으로 따뜻한 지역이어서 일찍 꽃이 피었다.
멜린 농장도 커피꽃 천지였다. 농장 한편 우리에는 족제비 15마리가 있었다. 그 옆에는 족제비 분변이 소쿠리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사향고양이 분변에서 원두를 채취하는 루왁(Luwak) 커피와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커피다. 농장에서는 한 해 커피 8톤을 생산하는데 230㎏만이 위즐 커피란다. 연유를 타 마시는 베트남 전통식으로 위즐 커피를 주문했다. 가격은 6만동(약 3000원). 일반 베트남 커피의 두 배 값이었다. 확실히 향이 독특했다. 어떤 커피에도 없는 화학적인 맛이 났다. 그럴 수밖에. 족제비는 당도 높은 커피 체리 중에서도 가장 잘 익은 것만 골라 먹는다. 그리고 소화 과정에서 쓴맛이 줄고 풍미가 살아난다.

농장측은 족제비와 가족처럼 지낸다지만 족제비의 기운없는 눈망울이 계속 생각났다. 한 잔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라비엣 커피와 커 커피 원두는 여행 캐리어의 절반을 채울 만큼 사왔다. 지금도 그 커피를 내려마실 때면 꽃향기가 맴돌고 하얀 커피꽃의 장관이 아른거린다.

·여행정보=달랏 기온은 연중 최고 22~25도, 최저 12~15도다. 환율은 베트남 1만동이 약 500원, 전압은 한국과 같은 220v. 한국에서 달랏으로 가려면 하노이나 호치민을 경유해야 한다. 베트남 저비용항공 비엣젯항공(vietjetair.com)이 인천~하노이·호치민, 부산~하노이 노선을 매일 운항한다. 하노이·호치민~달랏 국내선은 하루 2회 운항. 한국~베트남 왕복 항공료는 최저 20만원, 국내선은 왕복 3만~5만원 선. 비엣젯항공은 비즈니스클래스 개념의 ‘스카이보스’ 좌석을 운영한다. 좌석 간격이 넓고, 공항 우선 수속·라운지 이용·기내식 제공 등 혜택을 준다.

달랏시장 부근에 호스텔이나 1박 5만원 선의 3성급 호텔이 많다. 고급 숙소를 찾는다면 중심가에서 10분만 벗어나면 된다. 100년 전 프랑스인이 지은 빌라를 개조한 아나 만다라 리조트(anamandara-resort.com)가 대표적이다. 비수기 주중 1박 약 15만원. 라 비엣 커피 체험 프로그램 1인 65달러. 참가자가 2명 이상이어야 운영된다. 전화(+84-96-659-29-42)나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coffeelaviet)로 문의.


글·사진=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