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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제럴드 포드의 ‘치유를 위한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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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 훈 논설실장

최 훈 논설실장

묘하게도 닮았다. “시간이 걸려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자택 칩거에 들어갔다. 닥쳐올 검찰 수사에서의 생존, 5월의 대선과 이후 자신의 정치적 부활 등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8일 사임한 닉슨 전 대통령 역시 캘리포니아 해변 샌 클레멘테의 별장에 틀어박혀 옥죄어 오는 수사와 사면 가능성 등 운명의 선택지를 들춰보고 있었다.

숱한 논란과 번민 닥쳤지만 #닉슨 용서한 양심의 명령은 #분노가 관용 결코 못 이기고 #나라 평정이 최고선인 때문

미국 역사상 가장 용기 있는 결단의 하나로 꼽혀 온 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전임자 닉슨에 대한 사면이다. 포드는 자서전 『치유를 위한 시간(A Time to Heal)』(1979)에서 당시의 고뇌를 소상히 토로했다. 갓 취임한 포드에게 그의 군사비서관인 밥 배릿 육군 소령은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린 모두 워터게이트 중독자가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정맥에 주사를 놓고, 어떤 이는 코로 흡입하고, 누구는 술에 타 마신다. 이 약물 남용의 반복으로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포드는 닉슨식 통치의 그늘을 지워나가려고 무진 애썼다. 닉슨은 기자회견을 혐오했다. 까칠했던 언론·예술인·스포츠 스타 등 ‘적의 리스트(enemy’s list)’도 만들었다. “주요 정책은 닉슨이 거의 서면(paperwork)으로 보고받았으며 내각 회의 때도 악수나 친밀한 대화는 없었다. 그는 백악관 은둔형이었다”고 포드는 기억했다. 그는 닉슨이 관심조차 없던 찰스 랭글 등 미 흑인의원회 의원과 여성 의원들, 공화당에 적대적이던 AFL-CIO(미국 최대 노조) 간부들을 가장 먼저 초청했다.

첫 기자회견에서 포드는 호전적이기만 했던 닉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기자석까지 연단 가까이 옮겨놓았다. 국정 전반에 걸친 친절한 설명 준비는 물론이었다. 그러나 UPI의 헬렌 토머스를 시작으로 백악관 기자들은 ‘닉슨의 거취’로만 으르렁거렸다. 포드는 직후 “내가 완전히 틀렸다”며 “내 등 뒤엔 ‘닉슨과 워터게이트’란 성깔 사나운 원숭이가 찰싹 붙어 있다. 이걸 떼내지 않고는 경제·외교의 국정은 한 발짝도 못 나간다고 결론지었다”고 회상했다. “어떤 이슈도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전직 대통령의 드라마를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닉슨 사면의 정당성에 대한 그의 번민은 회고록의 핵심이다. “닉슨의 지시대로 한 참모들은 감옥에 있는데 닉슨만 자유로운 건 이중적 사법 아닐까. 아니야,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것만으로, 또 그 굴욕으로 여생을 보내야만 한다는 건 그 자체로 감옥과 똑같은 형벌일 거야. 관용이야말로 우리 미국을 만든 뿌리 아닌가.”

“하지만 사면하면 국민들은 워터게이트의 전모를 모른 채 종료되는 게 아닐까.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닉슨일 텐데. 법적 진실을 밝힐 길을 배제하는 건 아닐까. 아니야, 닉슨이 재판의 피고로 나선다 한들 이미 드러난 범죄 사실들에 추가될 게 뭐가 있을까. 리언 자워스키 특검 측 얘기론 닉슨의 사법 처리 수순을 마무리하려면 2년에서 6년까지 기약이 없다는데….”

“닉슨이 사면받으려면 자기 죄를 인정해 줘야 하는 건데 닉슨이 받아들일까. 사실 닉슨의 사임 연설 때도 충격을 받았지. 의회의 지지 상실이 사임의 이유라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며 국민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훨씬 반응이 좋았을 텐데. 닉슨이 사면과 동시에 죄를 인정하는 성명을 내달라는 약속은 받아야 할 것 같아(닉슨은 이를 추후 실행했다). 참모들은 사면 즉시 지옥 같은 언론과 발광 직전의 백악관 기자들을 각오해야 할 거라고 하고….”

“포드도 감옥으로(Jail Ford)”의 성난 외침 속에 그는 사면 발표 당일의 심경을 이렇게 요약했다. “오랜 논쟁에 양극으로 나뉜 나라의 평화와 안정만이 국민 전체를 위한 일이며, 이 악몽을 더 이상 연장하거나 치유의 시간을 파괴하지 말라는 게 양심이 내게 준 명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와 차기 대선 등 비슷한 격랑을 맞은 우리가 포드에게 얻을 메시지는 이런 게 아닐까. 증오와 분노가 결코 관용과 치유를 이길 수 없고, 법의 테두리 안이라면 ‘나라의 평정’이 모든 논란에 앞서 국민을 위한 최고의 선이라는….

포드는 소년 시절 좀체 화를 못 참는 분노조절 장애였다고 자서전에 밝혔다. 그런 그를 ‘사람 좋은 제리(Jerry)’로, 훗날 용서와 화합의 상징으로 치유시킨 건 그의 어머니가 반복해 읽게 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만일(If)’이었다. “… 만일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을 스스로 신뢰할 수 있다면…. 만일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그 두 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만일 너의 전 생애를 바친 일이 무너지더라도 몸을 굽히고서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최 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