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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나가 삭발하기보다 노란리본 달고 SNS”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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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11면

[창간 10주년 기획] 14년간 바뀐 세대별 정치·사회 성향 분석
포스트86세대 8명 심층 인터뷰

‘진보와 반북’.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4년간 총 13차례 실시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통계 데이터에 나온 포스트86세대(1970년생 이후)의 특징이다. 기존 통념에 비춰 보면 진보와 반북은 어색한 조합이지만 조사 결과는 포스트86에 대해 “전 세대 중 가장 진보적 입장을 지지하며 2008년 이후 북한에 대해 적대적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말하고 있다. 중앙SUNDAY는 통계 이면에 숨어 있는 이들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진보 성향 포스트86세대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북한의 위협 실체로 인식 #정치목적 학생운동 거부감 커 #“개인이 모여 사회변화 이끌어”

“북한은 주적”이라 생각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포스트86에게 북한은 실존하는 위협의 대상이다. 서울시립대 교지 편집장인 이정민(23)씨는 “북한은 우리와 군사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고 실제 공격도 할 수 있는 국가로 본다. 연평도 포격 등을 보면서 명백한 전쟁행위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동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보다 냉정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연령대가 높은 이들도 동일한 취지로 얘기했다. 지방 사립대 교직원인 윤항주(36)씨의 평가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모두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다친 사건이다. 금강산 관광 도중 북한에 의해 피살된 박왕자씨 사건도 있었다. 북한 군인의 공격에 실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북한을 한 민족이라고 ‘오냐오냐’ 하면서 용인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일이다.”

최근 발생한 김정남 피살사건은 이 같은 인식을 더 공고히 해 줬다. 단국대 학생인 유용석(22)씨는 “북한이 얼마나 잔악한 나라인지 느끼게 해 줬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하기에 국제적 비판까지 감수하며 자신의 이복형이자 정적인 김정남을 제거했나 싶었다. 이 자체로 북한의 위태로운 현 상황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성 운동권과는 차별화

지난해 ‘이화여대 학생시위’와 박근혜 대통령 규탄 ‘촛불집회’는 포스트86이 참여하는 시위가 기존 86세대의 시위 문법과 얼마나 다른지 여실히 보여 줬다. 이화여대 시위에서는 ▶주도자가 없고 ▶비폭력을 지향했으며 ▶정치적 목적을 노리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 차단됐고 ▶운동권 민중가요 대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등 대중가요를 부른 점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촛불집회도 비폭력적인 점, 정치인의 참가가 힘을 얻지 못한 점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이화여대 시위에 참여했던 황모(20)씨는 시위에서 ‘벗’이란 명칭을 사용한 점을 들어 차이를 설명했다. 벗은 이화여대생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다.

“참가한 학생들은 나이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다. 참가 이유도 다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벗이라고 부르는 순간 하나의 목적에 공감한 연대가 이뤄질 수 있었다. 벗이라는 이름 안에선 자신의 공식적 직함이나 학년·전공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외부 세력의 개입을 막은 것도 그들이 자기 단체명을 언급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성 운동권에 대해선 비우호적 분위기가 많았다.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탈퇴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윤나은(24)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은 “2014년 단과대학 학생회에서 일하면서 한대련 활동을 했다. 하다 보니 정치 활동에 대한 윗선의 강요가 많았다. 어떤 선배는 졸업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매일 찾아와 데모나 정치 활동을 권유했다. 대학생 연합이면 대학생 연합다운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정치 활동을 요구하더라. 그런 부분에서 문제의식이 컸다”고 말했다.

새로운 진보, 새로운 운동방식 필요

인터뷰에 응한 포스트86들은 시대 변화에 맞춰 진보의 모습도 변해야 된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성균관대 학생인 최민석(28)씨는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일반인들이 접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졌고 우리가 마주한 현장도 예전과 달라졌다. 진보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원 강사인 박경흠(30)씨는 “과거 같은 조직적 방식의 투쟁은 맞지 않다. 요즘엔 자기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팔찌를 차고 다니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연대한다. 어느 누구도 집회에 나가 삭발을 하고 울분을 토하는 민주투사처럼 보이진 않지만 이들의 열망은 그 못지않은 것이다. 원자화된 개인이 모여 광화문광장의 촛불을 만드는 시대가 된 만큼 운동방식도 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제 제기를 해야 할 지점에서 이를 방관하거나 나와는 무관한 일로 여기는 부분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유영현(24) 전 부산대 총학생회장은 “과거처럼 폭압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는 것처럼 행동하진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생각을 표출하고 행동하는 부분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이런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게 매우 쉬워졌다. 집회 현장에 나가진 않지만 최소한 목소리는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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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제 기자, 나영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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