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선생본색(先生本色)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상복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상복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대학교수입니다. 대학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좋은 직업 중 하나로 쳐줍니다. 신분이 보장되고, 보수가 좋으며, 1년에 적어도 몇 달 정도는 속된 표현으로 놀고먹을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입니다. 급여는 선진국 못지않을 정도로 높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보다 유리한 편입니다. 연봉제를 실시하는 선진국 대학에서는 방학 동안 월급이 없습니다. 연구 업적과 교수 능력 평가 결과에 따라 탈락하는 비율이 우리하고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습니다.

나의 사명은 교육·연구·봉사임을 되돌아보고 #만세사표가 될 것을 가슴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대학은 교육하고, 연구하며, 봉사해야 할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나는 바로 이러한 대학의 사명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외국인 A교수를 만나 대학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되돌아봤습니다. 그래서 봄 학기가 시작되면서 교수생활 10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해 봤습니다. A는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육은 연구보다 중요하며, 훌륭한 대학교수의 조건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연구가 제일인 줄 알고 교육의 사명을 등한시했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나 자신의 학문적 탁월성을 구축해 나가는 데 장애요인으로 생각했습니다.

학문적 업적이 보잘것없는데도 하찮은 학술모임을 핑계로 강의시간을 임의로 변경했습니다. 수년 동안 새로운 내용의 준비 없이 구태의연한 내용의 강의안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대학에서의 교사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준비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이미 자신을 훌륭한 선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효율적인 교수방법을 따르지 않고 학생들의 다양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 중심’의 강의를 했습니다. 앞으로는 ‘나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의 강의를 하겠습니다.

요즘 ‘사제 간의 정(情)이 갈수록 메마른 논처럼 갈라진다’고 합니다. 나는 학생들과 정을 쌓기 위해 노력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학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윽박지르며 혼낸 적도 많습니다. 상담을 하기 위해 불쑥 찾아오면 미리 예약하지 않고 찾아왔다며 고함을 지르고 쫓아낸 적도 있습니다. 상담을 예약하고 찾아오라고 가르쳐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e메일의 문구가 예의에 어긋난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권위적인 고자세로 괜한 트집을 잡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학생들이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거리감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옵니다. 앞으론 연구실의 문턱을 낮추겠습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을 좀 더 인격체로 대하며,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애정과 관심을 갖고 대하겠습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올바른 정신적 가치를 얘기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소속된 학교와 나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며 역량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A는 “교수들이 수많은 논문을 써내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평범하거나 표절의 냄새가 나거나 여러 가지를 모아 놓은 백과사전 같은 수준일 뿐 새로운 석학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내 논문들은 정말이지 독창적인 연구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심사에서 통과되고 업적 평가에선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대부분이 아주 평범한 연구입니다. 심지어 모방의 냄새가 짙은 연구도 있습니다. 아니, 이것저것 모아 놓은 잡동사니 연구를 하고 법학의 대가(大家)라고 착각한 적도 있습니다. 미국을 학문적 종주국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논문을 번역해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고 말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양질의 연구를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선생으로서의 내 언행과 가치관은 은연중에 학생들의 정서적인 면까지 깊이 영향을 미칩니다. 내 역할은 학생들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나는 정성을 들여 교육하고 연구하며 교육과 연구를 통한 봉사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만세사표(萬世師表) 네 글자를 가슴속 깊이 새기면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