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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0·26사건 날 태어난 여성의 삶 … 현실과 닮은 우화같은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두 번 사는 사람들
황현진 지음, 문학동네
348쪽, 1만3000원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장면과 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구석이 있는 장편소설이다. 장편이다 보니 집필 당시 지금의 탄핵 상황을 예측했을 리 만무한데 소설은 “1979년, 많은 설명이 필요한, 한 해였다”라는 의미심장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격동의 70년대의 마지막 나날들이었고, 긴급조치 제9호 시대의 막바지였으며 무엇보다 1917년생 남자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1926년생 남자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해였다고 이어나간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바로 그 날 1960년생 여자 박정희가 예정일을 한 달이나 앞당겨 여자아이를 출산했다는 게 소설의 설정이다. 동명이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순간 소설의 등장 인물 박정희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끔찍한 산통에 정신을 잃는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람들의 격한 외침이 주술적인 실행력을 발휘해 산모 박정희도 머지않아 죽는 운명을 맞는다.

소설은 박정희가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딸 조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조구가 어엿한 성년이 되는 2000년대 초반까지를 아우르는데, 그렇다고 조구의 이야기에만 붙들리지도 않는다. 조구의 아버지 조금성이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하숙집의 다양한 하숙생들, 조금성의 아버지·어머니와 박정희의 아버지·어머니, 그러니까 조구의 조부모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 땅을 살다간 혹은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거친 인생역정을 다룬다. 그런데 인물들은 윤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본능과 욕망을 좇는다. 동물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가운데 살가운 정이 싹튼다. 일제 치하 만세운동이나 한국전쟁, 산업화 시대의 풍경이 무대 배경막처럼 곳곳에 펼쳐지지만 개인들이 겪는 비극의 직접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으니 소설 속 현대사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활용도 그런 수준에서 이뤄진다. 무엇보다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이야기의 다채로움이 매력적이다. 천명관의 장편 『고래』 이후 유례가 없었던 듯하다. 주말 오후를 기꺼이 투자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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