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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로건'은 서부극에 대한 헌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과거를 속죄하는 서부극 주인공처럼

‘로건’의 한 장면. 불량배의 총에 난사당한 로건은 지친 몸을 이끌고 멕시코 국경 지대로 향한다. 푸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외딴 사막에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낡은 공장 건물이 있다. 인적 드문 이곳에서 로건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더 이상 초능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된 ‘프로페서 X’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 교수와 살고 있다. 그러나 곧 불청객이 찾아든다.

황량한 사막 풍광과 고독한 영웅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투가 벌어지는 무법 지대. ‘로건’은 초반부터 서부극의 뚜렷한 인장을 드러낸다. 권선징악적인 기존 서부극보다 무법자들의 번민과 지리멸렬한 현실을 담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수정주의 서부극의 영향이 특히 짙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이러한 선택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로건을 다른 돌연변이들과 구분 짓는 특징이 ‘고통’이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

영화 <셰인>.

영화 <셰인>.

울버린의 초능력은 생살을 찢고 나오는 ‘클로’와 세포를 빠르게 재생해 노화까지 막는 ‘힐링 팩터’다. 200년 가까이 그는, 고통의 대가로 얻은 발톱을 휘둘러 무수한 악당을 죽였다. 상처는 아물지만 고통은 남았다. 그리고 이젠 점점 사라져 가는 초능력 대신 피고름이 그의 몸 안에 업보처럼 차오르고 있다. “옳든 그르든,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라는, 서부극 ‘셰인’(1953,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유명한 대사처럼. 마을을 떠나기 전, 카우보이 셰인(앨런 래드)이 자신을 따르던 소년 조이(브랜든 드 와일드)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장면은 ‘로건’에서 TV 속 영화로 직접 인용된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극 중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서부극의 고전 ‘용서받지 못한 자’(1992)도 언급돼야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제작·주연한 이 영화는, 한때 무자비한 살인자였던 무법자 윌리엄 빌 머니가 은퇴 후 과거를 뉘우치지만, 엄마 없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시 총을 드는 여정을 그린다. 잔혹한 총격신을 유독 강렬하게 묘사했던 변종 서부극 장르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표 배우 이스트우드가 스스로 서부극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성찰했다는 지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 어느덧 희끗희끗한 수염에 흉터투성이 주름진 얼굴로,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살육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로건의 얼굴에 ‘용서받지 못한 자’ 속 머니가 고스란히 겹쳐진다.

“아마도 로건은 인간을 돕는 것에 지쳤을 것이다. 인간들은 어린아이처럼 항상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새로운 사람을 사랑한 뒤 그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한 악당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악당이 나온다. 로건의 상실과 피로감에 촉각을 세웠다.” 맨골드 감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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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로건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살인 병기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 로라를 외면하지 못한다. 로건의 유일하게 남은 돌연변이 친구 칼리반 역의 스테판 머천트는 “로건이 쇠약한 자비에 교수와 어린 로라를 데리고 적들에게 쫓기며 미국 전역을 이동하는 장면은,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서부 범죄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조지 로이 힐 감독)가 연상됐다”고 했다. 서부극의 흔적은 미국 엘 파소와 멕시코 사막부터 미국 캔자스·사우스다코타의 황무지를 관통하는 대장정 곳곳에서 포착된다. 로건이 길을 떠나며 로라가 고른 웨스턴 스타일의 재킷과 카우보이 셔츠로 갈아입는 것이 나름 ‘위트 있는’ 신호탄. 추격 도중 기차가 등장하는 장면은 맨골드 감독이 2007년 연출한 서부 액션 ‘3:10 투 유마’의 기차 액션을 떠오르게 한다.

“조이, 집에 가서 엄마한테 계곡에 더 이상의 총성은 없을 거라고 말해 드려.” ‘셰인’의 이 대사는 극 중 엔딩신에서 다시 한 번 들려온다. 이 장면이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서부극은 샘 페킨파 감독의 1969년작 ‘와일드 번치’다. 이 영화 속 세상에서 버려지고 망가진 무법자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지키고픈 무언가를 위해선 전부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 로건도 그랬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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