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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사일런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30년 대장정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시끌벅적하게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외면했다 해도, 마틴 스코세이지(74) 감독 필생의 대작 ‘사일런스’(원제 Silence, 2월 28일 개봉)가 전하는 깊은 울림의 의미는 조금도 퇴색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 침묵하는 신(神)의 뜻을 이해하려 몸부림쳤던 신부(神父)의 이야기를 통해 스코세이지 감독은 평생 화두였던 ‘신의 뜻’을 영화에 오롯이 담아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흐르는 종교적 테마를 통해 ‘사일런스’의 의미를 들여다봤다.

‘사일런스’로 완성된 거장 감독의 영적 순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가운데)과 로드리고 프리에토 촬영감독(오른쪽)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가운데)과 로드리고 프리에토 촬영감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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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상을 떠난 미국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시켈이 쓴 대담집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비즈앤비즈)를 보면, ‘사일런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2010년 가을에 진행한 인터뷰인데도 스코세이지 감독은 미국에서 2016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사일런스’ 이야기를 한 것이다. 거의 기-승-전-‘사일런스’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인간이 되라는 유혹을 받은 예수의 모습을 그린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이 작품을 연출한 이후 ‘사일런스’는 그에게 언제나 “만들어야 할 영화”였고 “최종 목표”였다. 이 대담집에서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를 어떤 화면 비율로 찍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만약 제가 마침내 ‘사일런스’를 만들게 된다면…”이라 운을 뗀 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아와 자만심을 버리는 것에 대한 작품”이자 “그리스도교의 정수를 담은 영화”라 말한다.

그렇다면 스코세이지 감독은 전 세계 기독교인을 위한 종교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여기서 우리는 ‘사일런스’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첫 번째는 그 어떤 맥락도 배제한 채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사일런스’를 바라보는 입장이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각색한 영화로서, 17세기 일본에 도착했던 포르투갈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두 번째는 노장 감독 스코세이지의 삶과 작품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왜 그토록 사무치게 ‘사일런스’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그는 왜 30년 가까이 이 영화에 매달렸던 걸까? 후자의 방식에 초점을 맞춰 이 글을 쓴다.

30년 대장정의 역사

스코세이지 감독이 ‘사일런스’를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잠깐 살펴보면, 이야기는 좀 더 명확해진다. 그가 『침묵』을 처음 접한 건 1988년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전 세계적 논쟁을 일으키며 온갖 피켓 시위 속에 개봉한 해이기 때문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자신이 ‘골수’ 가톨릭 신자임을 내세우며 진심을 피력했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그를 ‘신성 모독자’로 몰아붙였다. 이때 이 영화를 본 사람 중에는 미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폴 무어 신부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본 다음 날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책 한 권을 소개했다. 바로 『침묵』이었다. “예수께서 내리신 선택이 바로 그분 신앙의 정수입니다.” 무어 신부의 추천사와 함께 읽어 내려간 『침묵』은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에 영화화 판권을 획득한 그는, 이른바 ‘패션 프로젝트(Passion Project)’라는 이름으로 ‘사일런스’ 작업에 들어갔다. 그때는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 이토록 긴 세월이 걸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사일런스’를 찍으려 했다. 달라이 라마의 삶을 그린 전기영화 ‘쿤둔’(1997) 다음에, 1860년대 초 미국 뉴욕이 주요 배경인 범죄영화 ‘갱스 오브 뉴욕’(2002) 다음에,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살인자들의 섬』(황금가지)을 바탕으로 한 심리·스릴러영화 ‘셔터 아일랜드’(2010) 다음에 끊임없이 시도했다. 하지만 영화사에서는 매번 다른 작품을 원했다. 그러면서 법적 문제가 발생했고, 애당초 출연을 약속했던 배우들은 일정 문제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증권가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범죄·코미디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를 만든 뒤 스코세이지 감독은 결심했다. 이제는 진짜로 ‘사일런스’를 만들어야 할 때이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이후 거의 30년 만에 드디어 ‘사일런스’가 세상에 나왔다.

스코세이지의 영원한 테마는 죄와 구원

스코세이지 감독이 신에 대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성장 배경의 영향이 크다. 그는 뉴욕 로어 맨해튼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성장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그는 어릴 적 성당의 복사(服事)였고, 가톨릭계 학교에 다녔으며, 한때 신부가 되기를 꿈꿨다. 반면 현실은 거칠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힘센 존재는 거리의 터프 가이들과 성당이었다”는 말이 함축하듯, 스코세이지 감독은 범죄의 일상과 성스러운 공간 사이에서 성장했다. 하나 더하자면, 그에게는 영화관이 있었다. 천식 때문에 거리에서 뛰놀지 못하는 아들을, 그의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관에 데려갔다. 거리와 성당과 극장. 이 세 가지가 스코세이지 감독의 삶을 결정했다. 영화감독이 된 그는 거리의 거친 삶을 영화에 담아내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장악한 종교적 믿음을 그 안에 반영했다.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7)부터 고민은 시작됐다. 주인공 J R(하비 케이틀)은 모든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로 구분한다. 그런데 자신의 여자친구가 과거에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갈등한다. 여성의 순결에 대한 집착, 종교적 죄의식에 대한 강박, 편집증에 가까운 내면의 질문과 풀리지 않는 해답. 결말에서 J R은 성당 십자가의 예수 성상에 자기 혀를 찔러 피를 내는 의식을 치른다. ‘비열한 거리’(1973)의 찰리(하비 케이틀)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믿음과 마피아의 삶 사이에서 흔들린다.

거리와 성당, 속된 곳과 성스러운 곳, 죄와 구원. 이것은 스코세이지 감독 영화의 영원한 테마다.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죄로 썩어 문드러진 도시를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휩싸여 있으며, 어린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구원해야 한다는 일종의 ‘예수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성난 황소’(1980)의 제이크(로버트 드 니로)는 링 위에서 피 흘리는, 마치 죄를 위해 고통받는 순교자와 같은 이미지로 비춰진다. 이 영화는 성경 속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끝난다. 그가 1988년에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긴 세월 자신을 사로잡아 온, 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대면하고 싶었을 테니까.

‘신과의 대면’은 스코세이지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가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처음 접한 건 1972년이었다. 『침묵』을 읽었을 때처럼 즉시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16년이 흐른 뒤에야 영화로 완성할 수 있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영화 사상 가장 논쟁적인 ‘예수영화’를 만들었고, 드디어 자신의 ‘도덕적 근원’ 같은 존재인 신을 영화 속에서 대면한다. 그럼에도 그의 영혼은 채워지지 않았다. 겨우 ‘일단락했다’는 느낌 정도 아니었을까. 이때 운명처럼 『침묵』을 만났고, 스코세이지 감독은 다시 신과의 만남을 계획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영화에서 ‘영성(Spirituality)’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예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그린 영화보다 이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에서 더 잘 나타난다. 이를테면 ‘비열한 거리’ ‘성난 황소’ ‘비상 근무’(1999) 같은 영화에서 비유적으로 드러난 종교적 주제는 더욱 넓으면서도 매력적인 해석의 여지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셔터 아일랜드’는 영화 전체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수많은 영화에서 미장센과 디테일을 통해 끊임없이 종교적 이미지와 아이콘을 환기시킨다. 이 이미지들은 어느새 그의 인장이 되었다.

침묵하는 신에게 묻고 또 묻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랬듯, 선교사를 통해 신과 믿음을 다루는 ‘사일런스’의 직접성이 오히려 종교적 주제를 가리는 건 아닐까? 다행히 ‘사일런스’는 균형 잡힌 작품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예수의 인간적 유약함을 드러내며 인성과 신성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사일런스’는 조금 더 땅으로 내려온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세속주의’다. 거리에서 속죄하려 했던 ‘비열한 거리’의 찰리, 구원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던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피의 의식을 통해 순교하려 했던 ‘성난 황소’의 제이크 모두 ‘사일런스’ 안에 들어 있다.

‘사일런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영화다. 로드리게스 신부(앤드루 가필드)는 끊임없이 신에게 묻지만 신은 침묵한다. 그러면서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은 옳은 일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신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토록 인간을 고문하는 신이라면 저버려도 되는 존재 아닌가. 신의 은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인가, 아니면 기쁨인가.

여기서 스코세이지 감독은 로드리게스 신부 옆에 키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라는 인물을 놓는다. 그는 신을 부정했다가 받아들이는 걸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때마다 로드리게스에게 고해하고, 다시 죄를 짓고, 또다시 회개한다. 그러면서 끝까지 로드리게스 곁에 머문다. 로드리게스가 배교(背敎)한 뒤에도 그를 찾아가 고해를 부탁하며 자신의 신앙심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키치지로는 로드리게스의 멘토이자 스승이며, 신의 뜻을 전하는 예수 같은 존재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이 구원받을지 알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신의 뜻에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키치지로의 메시지다. 끊임없이 죄짓고 끊임없이 속죄하는 삶. 어쩌면 로드리게스는 그러한 키치지로의 모습을 통해 신의 뜻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사일런스’는 가장 비루하고 비겁해 보이는 인간 키치지로를 통해 ‘세상 속 기독교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내 인생엔 영화와 종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스코세이지 감독은, 항상 투쟁해 왔던 그 두 가지가 ‘사일런스’를 통해 화해하고 만나길 원한다. 젊은 시절에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거쳐, 백발의 노장 감독으로 ‘사일런스’에 다다른 그의 내면적 순례. 그 긴 여정을 ‘사일런스’에서 마침내 마친 셈이다. ‘할리우드의 수호 성자’인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혼에 부디 평안이 깃들기를.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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