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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마이크] 주민 모두 도우미 … 치매노인 7명 큰 불편 없이 함께 지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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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치매환자 100만 시대 <하>

지난달 22일 경북 포항시 도심에서 차로 40여 분 달려 장기면 산서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산(山)의 서쪽(西)에 있다는 뜻의 산서리 마을 입구에는 매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곳은 지난해 3월 경상북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범 선정한 치매보듬마을이다. ‘산서리 치매보듬마을 쉼터’ 현판이 붙어 있는 마을회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 20여 명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국 1호 ‘보듬마을’ 포항 산서리 #전체 217명 중 150명이 60세 이상 #주민들, 마을회관을 쉼터로 개조 #주2회 치매노인과 어울려 치료활동 #환자 부양 부담 지역사회가 나눠

치매사례관리사 김희정씨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아버님~. 여기 좀 보세요. 손 먼저 풀어 볼까요? 자, 이제 노래 틉니다.” ‘고향의 봄’이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김씨를 따라 손 율동을 했다. 이어 인지 치료 프로그램의 목적으로 ‘복주머니 족자 만들기’가 시작됐다. 형광 조끼를 입고 어르신 사이에 끼어 앉은 대학생 봉사자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국내 1호 치매보듬마을인 경북 포항시 산서리 마을회관에서 지난달 22일 마을 어르신 전체를 대상으로 인지치료 교실이 열렸다. 치매노인 치료를 돕기 위한 활동에 참석한 마을 주민.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국내 1호 치매보듬마을인 경북 포항시 산서리 마을회관에서 지난달 22일 마을 어르신 전체를 대상으로 인지치료 교실이 열렸다. 치매노인 치료를 돕기 위한 활동에 참석한 마을 주민.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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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식(70) 산서리 이장은 “산서리는 대대로 장수마을로 꼽히는데 혼자 사는 어르신이 많다 보니 예방 차원에서 치매보듬마을 신청을 하게 됐다”며 “마을 주민들의 교육 참여율이 높다”고 말했다. 경상북도에 따르면 산서리 마을 주민은 총 217명. 이 중 150명이 60세 이상의 노인이다. 이 가운데 인지 저하 증상을 보이거나 치매 진단을 받은 주민은 7명으로 쉼터에서 주 2회 이뤄지는 미술 치료와 감각자극 치료 등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에 이웃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경북도, 김천·구미·칠곡에도 추가 선정

치매보듬마을 선정 후 마을 주민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지난해 6월 인식조사에서 ‘치매 환자는 실종 위험 때문에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주민 비율이 75.5%에 달했지만 5개월 뒤 이뤄진 2차 조사에서는 38.8%로 낮아졌다. ‘치매 환자는 스스로 식사하기, 옷 입기 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높아졌지만(43.6%→72.4%) ‘치매 진단 시 시설에 입소하겠다’는 응답 비율은 낮아졌다(79.8%→68.4%). 김청덕(76)씨는 “우리 마을에도 치매 환자가 있는데 주말엔 환자를 돌봐주는 요양보호사가 안 온다”며 “주말마다 동네 이웃들이 환자분들을 쉼터로 모셔와 항상 같이 지낼 정도로 서로 돕고 있다”고 말했다.

경상북도는 산서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의성과 김천·구미·칠곡을 치매보듬마을로 추가 선정했다. 마을당 3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해 마을회관을 개조했다. 주민 교육과 치매 진단은 물론 전문가와 함께 치료 프로그램도 직접 개발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포항남구보건소 소속 강사의 지도로 간단한 손 체조와 복주머니 족자 만들기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위 사진은 치매노인 치료를 돕기 위한 활동에 참석한 마을 주민.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포항남구보건소 소속 강사의 지도로 간단한 손 체조와 복주머니 족자 만들기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위 사진은 치매노인 치료를 돕기 위한 활동에 참석한 마을 주민.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치매보듬마을을 올해 15개로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도내 238개 전 읍·면·동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경북 지역에는 요양시설 244곳, 요양병원 101곳이 있지만 문화적 특성상 입소를 꺼리는 어르신이 많은 것이 현실”이라고 치매보듬마을 도입 이유를 밝혔다. 김 지사는 “나 역시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7년간 모신 경험이 있는 치매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말없이 (집을) 나가셔서 실종될 뻔한 아찔한 경험도 있다”며 “치매로 인한 가족의 스트레스와 부담을 잘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빠르게 증가하는 치매 환자의 부양 부담을 지역사회와 정부가 함께 나누지 않으면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라며 “치매 극복을 위해 지난해 6월부터 경북 지역 대학들과 업무협약을 맺고 미래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예비 전문가들을 육성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도시 지역도 동 단위에서 실험해볼 만

곽경필 경상북도 광역치매센터장은 “의사 입장에서 치매 환자들에게 약을 처방하는 것 말고 비약물 치료로 치매 환자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치매보듬마을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 뜻깊다”고 말했다. 곽 센터장은 “쉼터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과 학생들에게 치매 교육을 하고 각 상점에 치매 관련 안내문을 배치하면서 시범 운영해 보니 마을 커뮤니티를 구심점으로 한 치매 지원 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산서리의 성공 경험은 소중하지만 중앙치매센터 차원에선 노인 인구가 많은 도시 지역 ‘동(洞)’ 단위에서도 치매보듬마을 운영이 가능한지가 고민”이라며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치매 환자를 지역사회가 공동으로 돌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설명했다.

◆ 특별취재팀=이동현(팀장)·김현예·이유정 기자·조민아(멀티미디어 제작)·정유정(고려대 3년) 인턴기자 peoplemic@peoplem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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