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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노벨상, 획일적 세계화에 딴죽 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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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06면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술라주 미술관’(2014).코르텐 강판을 써서 빨갛게 녹슬어 갈수록 견고해지게 만들었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술라주 미술관’(2014).코르텐 강판을 써서 빨갛게 녹슬어 갈수록 견고해지게 만들었다.

RCR의 드로잉

RCR의 드로잉

RCR의 세 공동대표. 라파엘 아란다·카르메 피겜·라몬 빌랄타(왼쪽부터)

RCR의 세 공동대표. 라파엘 아란다·카르메 피겜·라몬 빌랄타(왼쪽부터)

하얏트 재단이 1979년 제정해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는 프리츠커(Pritzker)상은 세계 건축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 페터 춤토르, 프랭크 게리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타 건축가들이 수상자로 낙점되곤 했다. 건축가 개인에게도 영예로운 수상이겠지만, 세계 건축계의 트렌드를 진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인류와 환경을 위해 건축이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리츠커상 받은 스페인 시골 건축가 3인방

하얏트 재단은 1일(현지시간) 올해 수상자로 스페인 건축사무소 RCR의 세 공동대표 라파엘 아란다(Rafael Arandaㆍ56), 카르메 피겜(Carme Pigemㆍ55), 라몬 빌랄타(Ramon Vilaltaㆍ57)의 이름을 호명했다. 트리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해서 건축 문외한이라고 생각하지 말길. 이들의 수상 소식에 영국 가디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little Known)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의 트리오,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까딸루니아의 소도시 올로트(Olot)에서 태어나 대학교 재학 시절을 제외하고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세 건축가가 프리츠커상을 거머쥐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올로트에 위치한 ‘로우 하우스’(2012). 하나의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바닥층을 끼워 다양하게 쓸 수 있게 했다.

올로트에 위치한 ‘로우 하우스’(2012). 하나의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바닥층을 끼워 다양하게 쓸 수 있게 했다.

“RCR은 건축물과 주변 환경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건축 재료를 선택하고 짓는 과정에서 의미 있고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입니다. 건축을 통해 나뉘었던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하얏트 재단 측이 밝힌 수상 사유다. RCR이 디자인한 건축물은 자연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 건축가는 지역의 자연환경을 연구하고, 여기에 어울리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30년 가까이 노력해왔다. 지역 공동체를 살리는 해법을 건축으로 선보인 셈이다.

자연친화적이라고 해서 이들이 흙집만 지은 건 아니다. 강철·유리·알루미늄 등 신소재를 주로 쓴 현대 건축물을 주로 디자인했다. 이질적일 수도 있는 건물들이 지역의 원시적인 환경과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필요한 공간을 최소한, 기능적으로 배치한 덕이다.

한 때 건축계는 ‘트로피 건축’에 열광했다. 20세기 초 미국 뉴욕에 지어진 102층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첫 사례였다. 중동과 아시아의 신흥 도시마다 초고층 건축물 건설에 골몰했다. 더 높게, 더 크게 지으며 경제력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 결과, 모든 도시가 똑같아졌다. 똑같이 화려한 ‘트로피 건축’은 도시의 기원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건축계의 고민은 시작됐다. ‘지역=퇴보, 도시=진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가 아닌, 모두가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얏트 재단이 시골 건축가의 프로젝트에 왜 프리츠커상을 수여했는지, 심사위원단이 털어놓은 고민의 과정은 이렇다.

“우리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포함해, 무역, 토론, 거래 등에 의존해야만 하는 세계화 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국제화에 오히려 두려움을 갖게 됐습니다. 지역 가치와 예술, 풍습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RCR은 우리에게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장 아름답고 시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고민에 답합니다. 지역과 세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으면, 팔이 다른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건축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로토의 ‘움직이는 레스토랑’(2011). 돌담 사이에 가벼운 지붕을 얹어 완성했다.

올로토의 ‘움직이는 레스토랑’(2011). 돌담 사이에 가벼운 지붕을 얹어 완성했다.

공원을 훼손하지 않고 만든 ‘토솔-바질 육상트랙’(2000)

공원을 훼손하지 않고 만든 ‘토솔-바질 육상트랙’(2000)

시골 건축가가 푼 건축계의 고민 ‘지역성 살리기’

RCR 창립자 세 명의 수상으로 스페인은 1996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이후 두 번째 수상자(또는 네 명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됐다. 아란다·피겜·빌랄타는 고향(Olot) 친구다. 셋은 나란히 바예스 상급건축학교(ETSAV)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고향에서 자리 잡았다. 1988년 셋의 이름 앞자를 딴 건축사무소 RCR을 창업하면서다.

이들의 귀환은 당시로써도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스페인에서 건축 명문대로 꼽히는 ETSAV를 나와 대도시에 취직하지 않고 인구 3만4000명에 불과한 소도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혹자의 표현대로 ‘소 밖에 없는 깡촌’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 ETSAV에서 수학한 이병기 아키트윈스 대표는 "이들은 여러 회고록을 통해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연구할 시간이 필요한 데 물가 비싼 대도시에서 버티기 힘들었고 가족이 있는 올로트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소회한 바 있다"고 전했다.

세 건축가는 10년 가까이 변변한 프로젝트 없이 버텼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지역을 촘촘히 탐구했다. 올로트는 대표적인 화산 지형이었다. 금속 가공이 발달한 도시기도 했다. 검은 땅과 대비되는 철판ㆍ유리 건축물이 RCR의 상징이 됐다. ‘트로피 건축물’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다.

그런데도 이들은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으로부터 ”공공과 사적인 공간부터 문화공간과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과 강하게 연결된 작품을 선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결이 뭘까. 남다른 ‘땅 읽기’에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산 안토니-조안 올리버 도서관’(2007)

바르셀로나에 있는 ‘산 안토니-조안 올리버 도서관’(2007)

‘엘 쁘띠 콤테 유치원’(2010)

‘엘 쁘띠 콤테 유치원’(2010)

자연합일 … 수묵화를 닮은 건축물

2000년에 완공한 육상 트랙(Tossols-Basil)이 대표적이다. 경기장은 올로트의 도심 가장자리이자 공원이 시작하는 지점에 지어졌다. 경기장 건설을 놓고서 환경보호자들의 반대가 심했다. 흔히 나무를 다 베고 토지를 다지고 새 건물을 짓기 마련이었다. RCR의 해법은 남달랐다. 공원을 전부 밀지 않고, 트랙을 포함한 경기장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사이사이 살며시 얹었다. 공원 속 육상 트랙이 탄생했다. 타원형 트랙 가운데와 주변은 떡갈나무로 무성하다. 건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스포츠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RCR은 지역 내에서 생산되어 재활용한 철판, 녹슬면서 단단해지는 코르텐 강판, 있는 듯 없는 듯한 투명 소재(유리ㆍ플라스틱)를 써서 안팎의 경계를 허문 듯한 건축물을 세밀하게 디자인하기로 유명하다. 이들의 건축물을 평가할 때 ‘시적(poetic)’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 송우섭 도시건축사무소 A.U.L.A 대표는 “고향의 풍경에 어울리면서 토착적이지만은 않은, 보편적인 건축을 RCR이 구현해냈다”고 설명했다.

RCR의 사무실은 옛 주조공장을 리모델링했다. 공장의 이름을 따 ‘바르베리 실험실(Barberi Laboratory)’이라 부른다. 옛 건물에 유리ㆍ강판 등 새 소재로 지은 건축물을 더해 오래된 듯 새 것 같은 분위기가 난다. 도서관·작업실·전시실로 구성된 실험실은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 건축가들이 건축을 향한 열정을 태우는 곳이다.

세 대표가 함께 쓰는 작업실도 독특하다. 커다란 테이블을 셋이 나눠 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꿈꾸는 공간을 찾고, 만나고, 토론하고, 명상하며, 침묵하고, 역사를 살피며, 냄새 맡고, 숨 쉰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RCR의 트레이드 마크는 디자인 컨셉트를 설명하는 간결한 드로잉이다. 이병기 대표는 “간결한 선으로 이뤄진 드로잉이 수묵화를 닮았다”며 “서구에서 볼 때 자연과 어우러지는 RCR의 건축물을 굉장히 동양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명성을 쌓은 이들에게 스페인 밖 러브 콜이 한창이다. 프랑스·벨기에·중동까지 진출했다.

‘라 리라 극장의 오픈 스페이스’(2011)

‘라 리라 극장의 오픈 스페이스’(2011)

프랑스의 ‘라 퀴진 아트센터’(2014)

프랑스의 ‘라 퀴진 아트센터’(2014)

건축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RCR의 프리츠커상 수상은 건축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세계 건축계의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지난해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건축 프로젝트를 선보인 국가관이 많았다. 지역에서 흔한 재료를 사용해 값싸고 빠르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건축 자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었다.

본 전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파라과이 건축팀 ‘가비네테 데 아르키텍투라’도 지역에서 생산한 벽돌로 만든 아치 구조물을 선보였다. 2012년 프리커상을 수상한 중국 건축가 왕수는 ‘수제 벽돌’과 그 벽돌로 지은 집을 전시했다. 중국 푸양시 인근 마을 재건 공사를 위해 길거리의 잡돌을 모아 분쇄해 만든 집이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칠레의 젊은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49)는 도시 빈민층을 위한 ‘반쪽짜리 주택’ 프로젝트로 극찬받았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 집의 절반만 지어주고, 집주인이 열심히 일해 나머지를 짓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프로젝트였다. 이처럼 지역성 및 고유의 풍경 살리기,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환경 개선, 재활용 및 환경 보호 등은 더이상 선언적인 구호가 아니다. 세계 건축계가 문제해결을 위해 골몰하고 있는, 가장 뜨거운 이슈다. ●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Hisao Suzuki / 하얏트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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