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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문재인만 못보는 친문 패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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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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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성이 많다고 평가받는 건 좋은 일이다. 함께 어울린다는 느낌이어서 보통은 칭찬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정치성이 있다거나 정치적이라고 지적받는 건 멱살 잡을 일이다. 대놓고 욕하는 것이기 일쑤여서다. 정치적이란 건 아마도 나누고 가른다는 어감, 내 편엔 맹목적으로 관대하고 상대편은 무조건 잘못이란 떼쓰기와 친족 관계여서 그럴지 모르겠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게 정치’라고 규정한 건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다. 마오쩌둥은 ‘피 흘리는 정치가 전쟁이고,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정치’라고 했다.

줄세우기·세몰이로 윽박 말고 #가치·철학 선택받는 게 새정치

정치의 본질이 패싸움이라고 해서 꼭 산전, 수전, 공중전에 육박전일 필요만은 없다. 말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품위 있고 세련된 방법으로 겨룰 수 있다. 상대방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지지층을 결집해 내는 건 말을 통해서다.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만들고 재생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의 힘이 강렬해지려면 감동을 줘야 하고 감동은 활발한 소통에서 나온다. 그래서 전 세계 일류 지도자는 모두가 듣는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위대한 소통자다.

그러나 한국에선 다르다. 제 구실 못한다고 삼류 취급받는 대한민국 정치는 강렬한 말도 거친 말도 아닌 힘으로 다툰다. 30년 가까운 군부독재와 거기에 맞선 3김 정치 유산인데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개선될 기미란 없다. 우리 편 잘못은 감싸고 표라면 무조건 몰아주는 묻지마 투표, 이를 위한 줄세우기·세몰이가 우리 선거판이다. 이번 대선도 다를 게 없는데, 그 선두엔 독주 중인 문재인 캠프가 있다. ‘이래도 저래도 문재인’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란 대세론 캠프다. 각종 위원회, 포럼, 자문단을 매일같이 띄우는데 싱크탱크엔 대학교수만 1000명이 넘는단다.

얼마 전 꾸린 안보 자문단엔 별이 100개 이상 몰렸다. 문재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는 반문 유권자의 안보 공포를 염두에 둔 ‘장군 방파제’일 텐데 그야말로 구식 발상에 구태 줄세우기다. 그런다고 안보 불안증이 사라지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정작 문 전 대표는 안보 이슈만 터지면 “그 질문은 안 하기로 했지요” “기억이 좋은 분들에게 들으세요”라며 이리 빼고 저리 돌아간다.

꼭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한·미 관계만도 아니다. 대선에 나섰다면 뭐가 됐든 현안마다 당당한 주장과 납득할 설명을 밝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자는 말을 아끼고, 캠프는 말할 기회를 줄이는 불투명 후보, 불통 캠프가 한국형 대세론이다. 그 결과가 오늘 시작되는 ‘탄핵 전 TV 토론 배제’의 당 경선 토론전이다. “개무시 당했다”는 경쟁자의 불평을 불렀다.

왜 그런 거냐면 친노 세력에 대한 친문 캠프의 부채감이 첫손가락 원인이다. 사회성은 높지만 정치성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문재인 전 대표다. 거짓말과 편가르기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문재인을 선택했다는 친노, 친문은 다르다. 적과 동지가 분명해 배타성이라면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문 전 대표는 어물대고 부자 몸조심의 친문 캠프는 줄세우기로 윽박지른다. 과거 대선에서도 무제한 TV 토론으로 후보들의 민낯과 실력을 검증하자는 요구가 많았다. 하지만 주로 대세론 주자들이 거부해 이뤄지진 못했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이 그랬다. 후회 많은 오늘의 대한민국인데 불과 4년 전의 실패 경험마저 잊어먹는 모양이다.

문재인은 구태 정치 대청소를 외치고 있다. 그러려면 친노, 친문의 배타적 진영 논리에 선을 긋고 말려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으로 가득찬 세상이 패권주의고, 패권주의 없애자는 게 새 정치 아닌가. 캠프엔 반문이든 비문이든 새 피가 넘쳐야 한다. 아니 이쯤에서 캠프 정치를 아예 버릴 때도 됐다. 그게 박근혜 정치를 완전히 깨는 길이다. 정치 혁신의 총아로 떠올랐다가 정치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역대 대세론 주자들의 추락 지점이 한결같이 구태 정치, 패권 정치였다. 예외라곤 없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