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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에 걸친 '추사 기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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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43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예가 손재형(1903~81)씨가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던 후지쓰카(아버지)를 찾아가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나 작품을 양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후지쓰카는 자신도 추사를 존경한다며 손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44년 여름, 후지쓰카는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들고 도쿄로 날아갔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손씨는 그를 일본까지 쫓아가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노(No)'. 손씨는 두 달간 매일 후지쓰카에게 문안인사를 했다. 손씨의 집요함에 마음이 움직인 후지쓰카는 결국 그해 12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손씨"라며 '백기'를 들었다. 후지쓰카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45년 3월. 후지쓰카의 도쿄 서재는 미군의 폭격을 받아 많은 유물이 불타버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세한도'는 하얀 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들 후지쓰카가 부친의 연구자료를 한국에 넘겨준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다. 과천문화원(원장 최종수)은 지난해 초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후지쓰카의 소재를 찾았다. 하지만 국내에선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일본학자를 통해 지난해 9월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최 원장은 바로 전화를 걸어 한국 방문을 요청했다. 이후 10여 차례 전화와 편지를 교환했다.

당시 최 원장은 "추사의 유품이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모두 불타고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지난해 말 '완당전집 영인본' '추사 연구 논문집' 등의 자료를 들고 아들 후지쓰카를 방문, 추사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의 '갈증'을 전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묵던 호텔방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료를 기증할 테니 다시 찾아와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처럼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사 연구에 보태쓰라며 200만엔(약 1600만원)의 '격려금'을 내놓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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