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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나는 촛불인가, 태극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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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나는 촛불인가, 태극기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 하지만 답이 쉽지 않은 질문,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질문과 마주한 건 순전히 친구 A 때문이다. 작은 금융사 대표인 A는 몇 주 전부터 주말에 태극기를 들었다고 했다. “촛불·태극기, 처음엔 관심 없었어. 그래도 심정은 ‘박근혜 퇴진’의 촛불 쪽이었지.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촛불의 공격 방향이 기업으로 바뀌더니 반기업 정서가 극에 달하게 됐어. 나라가 이상해지고 있는 거야.”

국민에 선택 강요 말고 #박근혜, 닉슨의 길을 가라

평소 그는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 된다고 믿어 왔다. 작은 회사나마 열심히 꾸려가는 게 애국하는 거라고 말해왔다. 친구들과 만나면 일 얘기, 경제 얘기를 즐겼다. 하지만 지난주의 그는 달랐다. “연예·스포츠 스타는 큰돈 벌어도 괜찮고, 기업인이 큰돈 벌면 욕 먹는 세상이 정상인가”라고 물었다. “기업 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태극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박근혜 좋아서 나오는 사람은 반도 안 될 것”이라며 “그런데도 태극기만 들면 보수 꼴통으로 몰아가는 언론은 도대체 뭐냐”고 따졌다. 그러고는 마침내 물었다. 너는 뭐냐. 촛불이냐 태극기냐.

나는 그날 입을 다물었다. 내 안의 촛불과 태극기는 아직 정리가 필요했다.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갔다. 촛불과 태극기 사이, 접점은 점점 멀어져 갔다. 서로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기 때문이다. 어제 3·1절의 광장은 그런 단절의 절정이었다. 말은 험해지고 행동은 거칠어졌다. 파국은 불 보듯 뻔하다. 나라가 두 동강 날 것이다. 막아야 한다. 열쇠는 박근혜 대통령이 쥐고 있다. 탄핵 열차가 종착역에 다다를 때까지 열흘쯤 남았다. 그 열흘의 시간에 나라를 구할 사람은 박 대통령뿐이다. 결자해지, 조건 없는 즉각 퇴진이 답이다. 진솔한 사과 말이 한 줄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나라와 결혼했다’는 말을 입증할 절체절명의 열흘이다.

미국의 경험이 참고가 될 수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3명이 하원에서 탄핵됐다. 앤드루 존슨(1867년), 리처드 닉슨(1974년), 빌 클린턴(1998년)이다. 그러나 아무도 최종 탄핵까지는 가지 않았다. 존슨과 클린턴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됐다. ‘미 합중국 대통령을 탄핵하는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국민적 암묵지(暗默知)를 상원은 존중했다.

닉슨은 좀 다르다. 위증과 사법 방해를 놓고 여론이 1년8개월 동안 나날이 나빠졌다. 상원의 탄핵안 가결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엔 닉슨이 국민의 암묵지를 따랐다. ‘미국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전례를 남길 수 없다’며 사임했다. 열흘 전인 1974년 7월 30일 밤까지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의 메모를 적었던 닉슨이었다. 억울했지만 사임이 더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미국은 대통령의 탄핵이 몰고 올 엄청난 분열의 후폭풍을 간발의 차이에서 멈춰 세웠다. 영국의 석학 폴 존슨은 『미국인의 역사』에서 닉슨을 높이 평가했다. 닉슨의 이런 결단과 비범한 통찰력이 그를 제퍼슨 이후 가장 존경받는 정계 원로로 남게 했다고 적었다.

박근혜의 길도 닉슨과 같아야 한다. 사즉생, 죽어야 산다. 쇠고랑을 차라면 차고, 감옥에 가라면 가야 한다. ‘꼼수 퇴진’ ‘꼼수 하야’ 소리가 일절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촛불이 태극기를 태우거나 태극기가 촛불을 끄지 않게 하는 일이다. 나는 그게 오늘 대한민국 국민의 암묵지라고 믿는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조사했더니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후 ‘나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보수’는 줄었다. 그 결과 진보(26.1%)와 보수(26.2%)가 엇비슷해졌다. 여전히 두터운 건 중도(47.8%)다. 중도는 단순히 중간이나 양다리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입장이 갈린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사드엔 찬성하지만, 박근혜는 퇴진하라’식이다. 그러니 촛불도 들고 태극기도 드는 것이다.

A야. 그날 미뤘던 대답, 지금 하련다. 양념과 프라이드, 꼭 하나만 골라야겠니?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은 안 되겠니?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