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속 타는 수입 계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서울 독산동에서 계란 도매를 하는 한모(53)씨는 요즘 밤에 잠이 안 온다. 불과 두 달 전엔 팔 계란을 확보하지 못해 잠을 설쳤지만 지금은 창고에 쌓여 있는 물량을 처리하지 못해서다.

한 달 전 AI 확산 때 들여온 776t #국산 공급 늘며 가격 경쟁력 상실 #첫 수입품은 이미 유통기한 만료 #재고 처리 못한 상인들 발동동

지난해 11월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으로 계란 품귀 현상이 나타나면서 한씨는 지난해 말 일주일간 가게 문을 닫았다. 때마침 정부가 계란 수입 문을 개방하자 한씨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도매상 3명과 함께 지난 1월 14일과 22일 두 번에 걸쳐 미국산 계란 300t(약 15만 판)을 수입했다. 하지만 당시 한 판(30개)에 9500원에 팔리던 계란은 설이 지나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현재 4500원까지 떨어졌다. 한씨는 “100t 가까이 남아 있는데 수입가격(7500원)보다 싸게 내놔도 사겠다는 곳이 없으니 큰일”이라고 말했다. ‘계란 대란’을 진화하기 위해 들여온 수입 계란이 ‘애물단지’가 됐다. AI 방역 절차상 유통되지 못하고 묶였던 국내산 계란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AI 확산으로 계란값이 한 달 새 두 배 가까이 치솟자 정부는 운송비 지원 등의 혜택을 내놓으며 계란 수입에 나선 바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1월 14일을 시작으로 국내에 들어온 수입 계란(2월 28일 기준)은 신선란 776t, 파우더나 냉동 형태의 난가공품 156t이다. 도매상 등이 개별적으로 들여온 수입 계란을 포함하면 물량은 더 늘어난다. 수입 계란은 반짝 관심을 끌었다. 롯데마트는 9일간 수입 계란 100t(약 5만 판)을 팔았다. 판매 첫날인 1월 23일 하루에만 1만3000판이 팔렸다. 당시 국내산 계란 소매가격은 9180원, 수입 계란은 8490원이었다.

하지만 설이 지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AI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묶여 있던 국내산 계란이 풀리기 시작했다. 명절 대목을 노리고 계란을 쌓아뒀던 계란 수집상이 물량이 푼 것도 이유다. 공급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도 내렸다. AI가 발생한 지난해 11월 수준까지 떨어졌다. 현재 대형마트에서 계란 한 판은 6550원에 팔린다. 지난해 11월 말엔 한 판에 6000원이었다. ‘흰 계란’에 대한 이질감도 작용했다. 비슷한 가격에 굳이 겉모양이 낯선 수입 계란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 공덕동에 사는 이선화(42)씨는 “지난달에 신기해서 한 판 사긴 했는데 색도 하얗고 아무래도 찝찝한 마음이 있다”며 “파는 곳을 찾기도 힘들지만 가격 차이가 확 나지 않으면 굳이 수입산을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유통기한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이 정한 계란 유통기한은 45일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첫 수입 물량은 이미 지난달 말 유통기한이 끝났고 나머지 물량도 이달 초부터 줄줄이 유통기한이 도래한다. 이 때문에 수입 계란을 보유한 도매상들은 식당이나 식품업체에 싼 가격에 처분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식품업체 입장에선 선뜻 수입 계란을 쓰지 못한다. 제품 원산지 표시를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계란 도매업체 관계자는 “결국 유통기한이 지난 계란은 헐값에 식당 등으로 유통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가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초 정부는 1000t 이상 수입하겠다고 나섰지만 계획 양의 70% 수준만 들여온 지금도 공급이 넘친다는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앞으로 추가 수입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대형유통업체 중 유일하게 수입 계란을 판매한 롯데마트도 추가 판매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조준혁 롯데마트 계란 상품기획자는 “수입 계란 판매가 시작되면서 국내산 계란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지금은 되레 가격이 역전된 상황이라 추가로 수입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수입 시점이 ‘뒷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상목 대한양계협회 경영정책국 부장은 “설 전에는 어차피 묶였던 물량이 쏟아지게 돼 있는데 뒤늦게 수입 계란을 푼 것은 수급 조절에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