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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우리에게 태극기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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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논설위원

양선희논설위원

언뜻 생각하니 평소엔 별로 태극기 생각을 않고 살았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살뜰하게 찾아 걸지도 않으니 오히려 무심한 편이다. 물과 공기처럼 늘 누리고 사는 일상적인 것. 태극기는 내게 그런 것이다. 일상이란 그렇게 긴장감 없이 흘러가고, 사람에게 절실한 것은 결핍된 것인데 이 시대 우리에게 태극기는 결핍이 아니므로.

민족 하나 되게 한 3·1절 태극기 #분열 넘어 통합 향해 휘날리기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태극기로 인해 감동받고 위로받았던 장면들이 꽤 많았다. 한국 선수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해 애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태극기가 올라가는 광경은 언제나 코끝 찡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줬다. 태극기를 진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도 많았다. 외국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태극기를 발견했을 때, 저절로 발길이 멈추어지고 다만 그로 인해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다. 외국 출장길에 들르게 되는 관공서의 만국기에서 태극기를 발견한 순간 너무 반가워 그 낯선 공간이 정겨워질 정도였다. 심지어 외국 식당에 장식용으로 걸린 만국기 중에서도 내 눈은 바삐 태극기를 찾았고, 그걸 찾아야만 안심이 됐다.

또 생각해보니 태극기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비장한 감정과 애착, 슬픔과 먹먹함 같은 비일상적 감상을 ‘소환’하곤 했다. 오늘 같은 3·1절에,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볼 때, 오래된 절을 개·보수하다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가 숨겨놓았던 빛바랜 태극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해방 후 세대인 우리에겐 없는 기억이지만 한때 나라를 잃었던 역사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각인된 가장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서일 터다. 그래서 태극기는 늘 애잔하다.

‘태극기 세력’.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운 건 나만 그런가.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찬반 의견은 누구나 표현할 수 있다. 그 찬반의 대극에 촛불과 태극기가 마주한 것까진 어쩔 수 없다 친다. 하나 태극기를 앞세우고 분열과 증오를 말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헌재 결정 불복을 논하고, 태극깃대가 기자들 때리는 도구로 변하는 걸 보는 건 조마조마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상들께 죄송해서, 또 우리 국민 모두에게 통합의 상징인 태극기를 ‘분열의 코드’로 읽고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하나 나는 태극기 진영의 애국심만은 믿는다. 일부 기득권 수호 세력의 선동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우리 역사의 발전을 위해 태극기를 들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이번 대통령 탄핵 국면은 고통스럽지만 우리 역사 발전에 나쁜 영향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걸로 보인다. 이번 사태에서 대통령 개인의 자질 부족과 무능으로 인한 국정 농단을 빼고, 부정부패만 보자면 과거 정부보다 더 규모가 크진 않다. 죄질은 나쁘지만 오히려 사소하다. 농단 세력이 자기 뜻을 다 관철시키지도 못했다. 국고에 손대려 했던 많은 부분은 어찌됐건 담당자들이 막았고, 상당 부분은 미수 사건에 그쳤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증거이고, 그 덕에 일찍 들통난 것이다. 국가적 위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과거 전례에 비해 죄가 크지 않고, 무능은 파면의 이유가 아니라는 탄핵 반대 측의 주장도 일견 일리가 있다. 또 국민을 속이고 국정을 농단해 국격을 떨어뜨린 대통령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탄핵 찬성 측의 의견도 나라의 미래를 위한 거다. 이젠 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헌재 재판관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헌재 결정이 어떻게 나오든 이를 계기로 다음 대통령들은 최소한 비선의 국정 농단과 자잘한 부정부패에도 경각심이 높아질 게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사회는 좀 더 투명해질 거다. 그리고 우리는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태도를 통해 법치국가로서의 국격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를 맞게 될 거다.

98년 전 3·1절, 처절했으나 우리 민족을 하나로 모았던 태극기를 생각한다. 오늘 태극기도 분열을 넘어서는 통합의 코드로 휘날리기를….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