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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자녀 교육 올인은 옛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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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24면

“이번 시험은 망쳤어요. 재수하고 싶어요. 하지만….”

올해 대학입시도 사실상 끝이 났다. 내가 만나는 많은 수험생 가운데 몇 명은 원하는 곳에 합격했지만, 더 많은 학생들은 실패를 경험했다. 평소 실력에 비해 실망스러운 대학에 합격해 낙담한 학생이 재수를 하고 싶다면서도 망설임을 드러냈다. 혹시 우울증이 있는 학생이라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 재차 물어보았다.

일러스트 강일구

일러스트 강일구

“저는 재수하고 싶지만 집에서는 지금 붙은 곳에 그냥 다니래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재수에 어디 한두 푼 드나요. 또 한다고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애 아빠랑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아이는 재수를 원하는데 부모가 반대하는 형국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반대였다. 아이는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수험생이 되고 싶지 않아 반대를 하지만, 부모는평생을 좌우하는 것이 대학이라며 1년만 더 고생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실제로 60만 수험생 중에 재수생이 20만 명 정도이니, 현재까지는 재수가 대세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서울에 사는 중산층인 부모가 아이의 재수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가 싹수가 노래서? 아니었다. 나중에 찬찬히 속내를 들어보니 부모 자신의 노후 불안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느새 교육에 대한 투자와, 중년을 지나가는 중산층 부모의 노후에 대한 불안이 만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에 대한 투자에는 아낌이 없었다.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대표적인 영역이었다. 그러나 사교육에 대한 투자는 비용에 비해 이익을 볼 기회가 적다는 것이 서서히 판명나기 시작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비용을 들인다고 해서 그만큼 아이의 성적이 좋아져, 더 좋은 대학에 가는 뚜렷한 효과가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평균 퇴직연령은 53세로 빨라지고, 평균 수명은 80세를 돌파하기 직전이다. 돈을 벌지 못한 채 30년을 버텨야 하는 미래다. 40~50대 초반의 입시생 부모에게는 이 경제절벽이 눈앞의 불안으로 다가와 버렸다. ‘교육만이 살 길’이라는 뿌리 깊은 신념이 노후 불안이라는 큰 벽 앞에 드디어 균열의 신호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지금까지 교육개혁과 노령화시대의 노후보장의 문제는 두 개의 독립적 어젠다였다. 그런데 이번 상담을 하고 나니, 결국 맞닿아 있는 한 가지 문제임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보니 비현실적으로 과열된 사교육과 입시문제는 의외의 방향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르겠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망을 투사하는 것을 참으려는 의도적 노력에 비해서, 막상 닥친 부모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불안은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노후의 경제적 준비 문제는 매우 분명하고 절실하다. 행여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부모가 있다면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봐야 할 일이다. 머지않아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야할 선택을 해야할지 모른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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