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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짜릿한 손맛에 반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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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08면

레고 사진가 이제형씨의 ‘제국의 침공’.

레고 사진가 이제형씨의 ‘제국의 침공’.

영화 ‘레고 배트맨 무비’ 스틸컷

영화 ‘레고 배트맨 무비’ 스틸컷

“딸각!”

어른들의 놀이가 된 레고(LEGO)

직육면체의 브릭(brick) 두 개가 맞물리는 경쾌한 음향은 누군가에겐 새로운 세계가 막 시작되는 소리다. 작은 브릭을 조합해 집을, 소방차를, 또 우주선을 만드는 장난감 레고(LEGO)에 한국의 3040 세대가 푹 빠졌다. 브릭랜드·브릭인사이드·브릭스월드 등 10여 개에 이르는 국내 레고 커뮤니티에서 활동 중인 회원수는 총 22만명. 이들 중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은 대개 30~40대 남성들이다.

레고는 1932년 덴마크의 작은 도시 빌룬트에 사는 목수 올레 키르트 크리스티얀센이 설립한 목제 완구회사로 시작했다. 레고라는 이름은 덴마크어로 ‘잘 논다’는 뜻의 ‘레그 고트(LEG GOGT)’에서 왔다. 1958년 원통형 돌기를 끼워 맞추는 지금의 레고 브릭이 특허를 받으며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한국에는 1984년, 즉 지금의 3040 세대가 막 초등학생일 무렵 처음 소개됐다.

2000년대 이후 어린이의 감성과 취향을 간직한 어른을 뜻하는 ‘키덜트(Kid+Adult)’가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레고는 어릴 적 ‘손맛’을 기억하는 어른들의 대표적인 취미로 자리잡았다. 진권영 레고 코리아 마케팅총괄 상무는 “레고를 즐기는 연령대가 12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지고, 매년 열리는 레고 창작인들의 전시에도 관람객이 급격히 늘고 있다. 특히 한국은 30~40대 마니아층이 탄탄하고 충성도 높은 고객이 많아 아시아의 중요한 시장으로 꼽힌다”고 했다.

지난 9일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개봉한 영화 ‘레고 배트맨 무비’ 역시 전체 관람객의 20%에 달하는 성인 레고팬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순항 중이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도시를 배경으로 레고의 미니 피규어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이 영화는 개봉 2주만에 북미지역에서만 1억700만 달러(약 1217억 원)를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다.

레고에 빠진 어른들에게 레고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이들은 작은 브릭으로 평생 갖고 싶었던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타고 싶었던 자동차를 조립하고,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나만의 세상을 창조해낸다. 레고 창작가, 레고 사진가 등 레고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직업도 탄생하고 있다. 레고로 새 인생을 연 두 명의 ‘성덕(성공한 덕후)’을 만나 물었다. 레고의 무엇이 당신을 사로잡았습니까.

이제형 작가의 ‘스톰트루퍼스 라이프’ 시리즈. 둘째 줄 가운데는 최순실 사태를 패러디한 ‘위치 앤 치킨(Witch and chicken)’,맨 아래 사진은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장도리 결투신이다.

이제형 작가의 ‘스톰트루퍼스 라이프’ 시리즈. 둘째 줄 가운데는 최순실 사태를 패러디한 ‘위치 앤 치킨(Witch and chicken)’,맨 아래 사진은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장도리 결투신이다.

미니 피규어의 단순함 속에 페이소스 담았죠
'레고 사진가' 이제형

레고로 패러디한 영화 포스터들.

레고로 패러디한 영화 포스터들.

경기도 일산의 레고작업실 ‘브릭팜’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이제형 작가.

경기도 일산의 레고작업실 ‘브릭팜’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이제형 작가.

16년차 교량설계 엔지니어인 이제형(43)씨는 원래 취미가 사진이었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건설회사에 다니면서도 늘 카메라를 메고 산으로, 들로 떠돌았다. 한편으론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푹 빠져 관련 물품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레고 스타워즈’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2009년쯤인데 사진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져 가고 마침 여섯살이 된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취미가 없을까 고민하던 때였어요. 우연히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를 발견했는데, 초등학교 때 ‘조금 사는’ 친구집에 놀러가서 감탄하며 놀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더라구요.”

아들과 함께 주말마다 영화 스타워즈를 한 편씩 보고, 레고 한 세트를 함께 조립하며 놀았다. 작품이 완성되면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그러다가 ‘기왕 사진 찍는 것, 새로운 스토리를 입혀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레고 사진가’가 됐다.

그의 대표작은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병사 스톰트루퍼를 주인공으로 한 ‘스톰트루퍼스 라이프(Stormtrooper’s life)’ 시리즈다. 하얀 헬맷을 쓴 스톰트루퍼 피규어가 회사의 말단 직원이 돼 직장 상사인 다스 베이더에게 혼쭐이 난다. 신병으로 군대에 입소해 대걸레를 들고 묵묵히 청소를 한다. 2010년 이런 사진 몇 장을 찍어 사진공유 사이트인 플리커에 올렸는대 호응이 대단했다.

“냉철한 살인병기인 스톰트루퍼에 인간적인 모습을 입힌 게 재밌었나봐요. 외국 스타워즈 팬들과 레고 팬들에게 메일도 많이 받았죠.” 스톰트루퍼들이 장작불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는 ‘사막에서의 캠핑’은 영국에서 출간된 레고 사진집 『레고 스타워즈 비주얼 딕셔너리(LEGO Star Wars visual dictionary)』에도 실렸다.

그는 평일에는 엔지니어로, 주말에는 레고 사진가로 일한다. 5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찍었고, 2014년 부터 기획사 모아이(MOAICO)에 소속돼 전시도 여러 차례 가졌다. 2015년 서울 신사동의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연 ‘폴 스미스&레고 스타워즈’ 콜라보 전시, 제주 롯데호텔에서 개최한 ‘돌하르방&스톰트루퍼’ 전시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해 10월에는 말을 탄 최순실을 레고로 형상화한 사진을 올려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씨가 생각하는 레고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함 속의 자유로움이다. 4?2짜리 레고 브릭 2개로 24가지의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고, 브릭 6개면 9억 1510만 3765개의 조합이 탄생한다. 하지만 때론 단순한 브릭 하나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오래 전 레고 광고 중 파란 바탕에 브릭 하나가 떡하니 올려진 사진이 있었어요. 어린 아이의 작품이었는데 제목이 ‘잠수함’이었죠.”

그가 주로 작업하는 미니 피규어 역시 팔 다리를 앞뒤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정도의 움직임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 단순함 속에서 어떤 ‘감정’을 잡아내는 게 재밌어요. 피규어의 머리와 팔다리를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서 30~40컷 정도를 찍은 다음, 제가 표현하고 싶은 분위기가 가장 잘 드러난 컷을 고르죠.”

집에 마련한 작업실은 스타워즈 관련 피규어 550개와 배경으로 쓸만한 각종 레고 제품으로 채워져 있다. 요즘은 “중학생인 아들이 조립을 하고, 아빠는 사진을 찍는” 식으로 분업을 하기도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건전한 취미를 선물하고픈 아버지들에게 레고를 ‘강추’한다고 했다. “아들이 컴퓨터 게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할 나이에 레고를 시작해서인지, 요즘도 PC방을 잘 안가더라구요. 레고 덕분에 사춘기인 아들과도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어요.”

올해는 레고의 본산지인 유럽에서 전시를 여는 게 목표라는 그는 “스타워즈 뿐아니라 레고를 이용한 정치풍자 등 새로운 시도도 적극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

https://www.instagram.com/lee_je_hyung/

위는 정운현 작가가 만든 ‘메카닉 공장’. 아래는 ‘웨딩 스튜디오’와 ‘미니 시네마’(가운데).

위는 정운현 작가가 만든 ‘메카닉 공장’. 아래는 ‘웨딩 스튜디오’와 ‘미니 시네마’(가운데).

언젠간 짓고 싶었던 예쁜 사진관, 레고로 만들었죠'레고 창작가' 정운현
오른쪽은 서울 봉천동 개인 작업실에서 직접 조립한 우주 열차를 들고 있는 정 작가.

오른쪽은 서울 봉천동 개인 작업실에서 직접 조립한 우주 열차를 들고 있는 정 작가.

정운현 작가가 레고로 만든 영화 ‘레고 배트맨 무비’ 로고.

정운현 작가가 레고로 만든 영화 ‘레고 배트맨 무비’ 로고.

지난 3일 서울 왕십리 CGV 영화관에서 열린 ‘레고 배트맨 무비’ 시사회에는 레고브릭 7600개를 조립해 만든 초대형 배트맨 로고가 등장해 시선을 모았다. 하하와 스컬, 아이돌그룹 세븐틴 등 레고 마니아로 알려진 연예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한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레고 창작가 정운현(39)씨다. “영화사와 레고 코리아의 의뢰를 받아 꼬박 한 달을 투자해 만들었어요. 전세계에서 공수한 142개의 서로 다른 레고 브릭을 사용해 레고 배트맨만의 거친 매력을 보려주려 했죠.”

정 씨는 국내 대표적인 레고창작집단인 ‘브릭팀코리아’에서 활동하는 8인 중 한 명이다. 레고 창작가란 말 그대로 수만 종류에 달하는 레고 브릭을 활용해 기성 제품이 아닌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이들을 말한다. 4년 전, 4000여 개 브릭으로 조립한 ‘웨딩 스튜디오’를 레고 사이트에 올려 호평 받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건물과 선박, SF물을 소재로 한 메카닉 계열 작품을 주로 만드는데, 정교하고 창의성 넘치는 그의 작품에 반한 팬들이 상당수다.

원래 직업은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전시 기획자. 2013년 아내와 우연히 대형마트에 들렀다가 레고를 ‘재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 초등학교 때 저거 좋아했는데”라며 하나 사겠다고 하니 아내가 반대했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 “한 달동안 술·담배 끊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하고, 그 돈을 모아 레고를 샀어요. 원래 한 번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 레고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죠.”

한 달에 30~40만원씩 들여 기성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조립을 하다보니 아쉬움이 커져 갔다. 조금 더 정교하게, 조금 더 화려하게 원래 제품을 변형해봤다. 본격 창작을 시작한 후론 LDD(레고 디지털 디자이너)라는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했다. LDD는 고객들이 온라인에서 가상의 레고 브릭을 이용해 자신만의 모델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레고사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잘 된 작품은 실물 브릭을 구입해 조립하고, 일부는 브릭코리아 컨벤션이나 키덜트 페어 등에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레고사는 1990년대 말 출시한 ‘스타워즈’ 시리즈에 성인팬들이 급격한 관심을 표한 것을 계기로 성인 고객들의 창의성을 활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레고 홈페이지에 전세계 창작가들이 작품을 올리면, 이용자들의 투표를 통해 실제 제품으로 출시하는 ‘레고 아이디어스(ideas)’ 시리즈도 그 중 하나다. “1만명 이상이 투표하면 제품 발매를 고려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를 비롯해 한국에서도 많은 창작가들이 도전했는데, 아직 제품화된 것은 없어요. 제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출시되는 것, 레고를 하는 많은 사람들의 꿈이죠.”

그는 레고의 매력에 대해 “꿈꾸던 것이 실물로 눈 앞에 등장하는 짜릿함”을 꼽았다. “30~40대 레고팬이 많은 이유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는 시기인데다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이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상상만 했던 세계를 창조주가 되어 직접 만들어보는 거죠. 저 역시 사진가로 일하면서 예쁜 사진관을 하나 짓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 바람을 담아 ‘웨딩 스튜디오’를 만들었거든요.”

레고 창작가로서의 최종 목표는 덴마크의 레고 본사가 직접 인증하는 ‘레고 프로페셔널(LEGO Certified Professional: LCP)’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나는 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원제 The Art of Brick: A Life in LEGO)』라는 책을 쓴 변호사 출신의 레고 아티스트 네이선 사와야를 비롯, 현재 레고 프로페셔널은 전세계에 단 14명뿐이다. 정 씨는 “레고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단 내가 즐거운 것이 우선”이라며 “나만의 개성을 담은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말했다. ●

https://www.instagram.com/jeong_woonhyun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전민규 기자·레고 코리아·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이제형·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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