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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재심'의 실제 주인공 박준영 변호사, 내가 재심에 매달린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영화 ‘재심’(2월 15일 개봉, 김태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이다. 2000년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발생했던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실화의 무게만큼 엄중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살인 사건을 목격한 10대 현우(강하늘)에게 경찰과 검찰은 살인자 누명을 씌운다. 1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하며 청춘을 잃어버린 현우. 그 앞에 변호사 이준영(정우)이 나타나 재심을 제안한다. 재심(再審)은 형이 확정된 사건을 다시 한 번 법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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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변호사의 이름 이준영은, 실제 사건을 맡았던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43)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레 실제 인물이 궁금해진다. 왜 이 변호사는 복잡한 사건을 다시 물고 늘어졌을까. 그의 남다른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박준영 변호사(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준영 변호사(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개봉을 앞두고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영화가 흥행해야 할 텐데 부담이 크네요”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투자라도 한 거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제가 맡았던 사건이고, 제 이름이 그대로 나오니까 관객의 입장에서 못 보겠더라고요. 변호사의 일이라는 게 의뢰인의 고통을 공감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제가 그걸 잘 못해요(웃음).”
박 변호사에게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2009, 홍기선 감독) ‘도가니’(2011, 황동혁 감독) ‘변호인’(2013, 양우석 감독)처럼 ‘재심’ 역시 재심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은 2013년과 2015년 TV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1992~, SBS)에서 두 차례 다뤄지며 세간에 알려진 바 있다. 범인으로 지목된 10대 최모군 수사 과정에서 불법 체포와 감금, 극심한 폭행이 있었고, 최군이 허위 자백을 하면서 법정 최고형이 선고됐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과오를 인정하기 싫었던 검찰은 그를 풀어 줬다. SBS 기자로부터 이 사건을 맡아보겠느냐고 제안받은 박 변호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익산으로 내려갔다. 2007년 경기도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 때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가출 청소년과 노숙인을 변호하며 재심 사건에 관심을 가진 차였다. 영화 속 이준영이 대형 로펌 대표(이경영)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건을 맡은 것과는 달랐다. 이를 지적하자 박 변호사는 망설임 없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극 중 이준영과) 비슷한 면이 있죠. 저도 처음엔 유명해지고 싶어 사건을 맡았거든요.”

'재심' 스틸컷 (사진=오퍼스 픽쳐스)

'재심' 스틸컷 (사진=오퍼스 픽쳐스)

전남 완도 출신인 그는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입대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군 선임을 따라 스물네 살 때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된 기쁨도 잠시, 현실은 냉혹했다.
“우리 사회가 인맥·경력·학벌을 중시하잖아요. 아무것도 없었던 저는 출발부터 쉽지 않았어요. 친척이나 지인까지도 사건을 맡기지 않으니 서럽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평생 한두 번 있을까 싶은 송사를 저 같은 배경의 변호사에게 맡길 리 만무하겠더라고요. 능력을 인정받아야겠구나, 의미 있는 사건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내고 그걸 알려야 내가 살겠구나 싶었어요. 처음엔 국선 변호를 주로 맡았는데, 사건을 수임해 주는 재판부의 눈에 띄고 싶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죠. 대형 로펌에서 환심을 사려는 이준영이나 재판부의 환심을 사려는 박준영이나 비슷하지 않나요.”

'재심' 스틸컷 (사진=오퍼스 픽쳐스)

'재심' 스틸컷 (사진=오퍼스 픽쳐스)

지극히 현실적이던 그가 사익보다 공익을 더 추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국선 변호를 하면서 그는 자기 방어권이 미약한 사람들을 주로 만나게 됐다. 그들의 고통을 곁에서 봤고,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됐다.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 때 이유 없이 범인으로 몰린 가출 청소년의 눈물을 보며 함께 울었다. “변호사님께 뭔가를 해 드리고 싶어도, 무료 변론이 죄송해 어떤 말씀도 못 드리겠더라”는 아이들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전북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가짜 강도 사건 등 재심 사건을 맡으면서 공익에 더욱 관심이 커졌다. 모두 무료 변론이었다. 사법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대개 지적장애인, 미성년자 등 수임료를 내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일반 사건은 아예 받지 않았다. “재심에서 ‘시간’은 각별하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증거는 사라지고 고통은 더 커지니까요. 집중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겠더라고요.”

영화 '재심'에서 살인 누명을 쓴 현우(강하늘·왼쪽)와 변호사 이준영(정우)의 대화 장면.  [사진제공=오퍼스픽쳐스]

영화 '재심'에서 살인 누명을 쓴 현우(강하늘·왼쪽)와 변호사 이준영(정우)의 대화 장면. [사진제공=오퍼스픽쳐스]

결과는 파산이었다. 심리가 길어지면서 지난해 박 변호사는 사무실 월세를 수개월째 못 낼 정도로 곤궁했다. 마이너스 통장의 대출액은 1억원 가까이 쌓였다. 세 아이가 딸린 가장으로서 참담했다. 그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란 타이틀로 자신의 사연을 포털 사이트에 연재하며 ‘스토리펀딩’에 나섰다. 시민들의 호응이 이어졌고, 후원금이 5억원 이상 쌓였다. 그는 “소시민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영화 속 정우가 그랬듯 익산과 서울을 수없이 오가며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찾으러 다녔다. 과로가 잦아 협심증이 생길 정도였다. 결국 그는 지난해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등 2건의 재심을 무죄로 이끌어 냈다.

6년 동안 매달린 사건을 영화로 본 심정은 어땠을까. 뜻밖에도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장의사였던 아버지는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반나절 쓰고 나서 태울 상여를 정성들여 꾸미고, 저수지에 떠오른 신원 미상 시신도 거뒀다.
“변호사도 남의 불행을 먹고 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처럼 그 불행을 배려하지 못했어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제가 최군의 고통을 막연하게 생각했구나 싶더라고요. 10년 옥살이에 살인범으로 사회적 냉대를 받았을 텐데, 그 불행을 절절하게 이해하지 못했구나 싶었어요. 그걸 모르면서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 사건을 시작한 게 너무 미안했어요. 극 중에서 준영이 현우에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돌이켜 보니 저는 그 말을 못했어요. 영화를 본 뒤 최군에게 전화했어요. 정말 미안했다고.”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가 재심을 통해 깨달은 건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자의 권익은 그들의 지위와 재력이 보호해 주지만 약자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것.

재심

재심

‘재심’은 아주 화끈한 결말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엔딩이 아쉽다는 분이 있더라고요. 그러데 저는 이 방식이 맞다고 봐요. 실제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하시죠? 아니거든요. 진범에 대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고, 범인은 자신이 한 짓을 부인하고 있어요. 최군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끔 만들었던 경찰, 검사, 판사, 국선 변호사, 진범으로 지목된 사람을 풀어 준 검사, 그 누구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어요. 진행형인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을 순 없는 거죠.” 
박 변호사는 현재 최군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국가 배상 소송과 4건의 새로운 재심 사건을 준비 중이다. 그는 시민들이 후원하고 있기에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재심 사건을 취재했던 박상규 기자(프리랜서)와 함께 사건을 정리해, 지난해 말 펴낸 책의 제목은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다. 그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십수 년 동안 왜 정의가 지연됐는지, 그 이유를 찾겠다는 뜻도 되고요. 무엇보다 그 말 안에는 언젠가 정의가 실현될 것이란 희망이 담겨 있으니까요.”

글=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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