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어는 웅어의 지방 말이다.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는 이 생선을 ‘한국 맛의 방주’에 등재(2014년)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는 슬로푸드국제협회가 1996년 시작한 프로젝트다. 세계 각 지역의 자연·역사·전통이 깃든 고유의 음식문화를 지키기 위해 소멸 위기의 음식과 식재료·종자 등을 선정하고 보존운동을 벌인다. ‘맛의 방주’에 등재된 품목은 2016년 말까지 세계적으로 3800개, 우리나라는 55개가 올라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에서 많이 잡히던 웅어는 ‘봄의 전어’로 불리기도 한다. 맛이나 크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함경·강원도를 제외한 전국 강에서 잡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다에 살다가 봄이면 강 하류로 올라와 5∼7월 갈대밭에 산란을 한다. 그래서 한자로 갈대 물고기, 즉 위어(葦魚)라고 한다. 물고기 모양이 갈대 잎을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강경·부여에서는 우여(또는 우어·위여), 의주에서는 웅에, 해주에서는 차나리라고 부른다. 다른 멸치과 물고기들처럼 잡히면 바로 죽는다.
조선시대에 봄이면 궁중 부엌살림을 책임지는 사옹원에서 한강 하구 행주에 위어소(葦漁所)를 설치하고 궁에 보낼 웅어를 전담해서 잡게 했다. 백제 의자왕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백제를 쓰러뜨린 소정방이 웅어를 맛보려고 부하에게 잡아오라 시켰으나 잡지 못했다. 그러자 ‘고기마저 의리를 지키려고 모두 사라졌구나’라고 말한 데서 ‘의어(義魚)’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실을 따져보면 백제가 망한 날짜는 사비성(부여)에서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서기 660년 음력 7월 18일이다. 초가을이 임박해 웅어가 바다로 돌아갔을 때였던 것이다.
예전엔 흔하던 웅어가 금강·영산강·낙동강에 하굿둑이 생겨 물길이 막히면서 귀해졌다. 한강에도 행주나루나 개화산 앞까지 올라왔었지만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갈대 숲이 사라지면서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 웅어 잡이는 어업으로서 경제성도 떨어져 시장에서 보기 드물어졌고 취급하는 음식점도 드물다. 그래서 웅어가 나던 지역에서 먹어본 사람들이나 봄철 추억의 맛으로 찾는 정도이고,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하는 생선이 되고 말았다. 웅어가 ‘맛의 방주’에 오른 사연이다. 요즘 웅어를 취급하는 음식점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잡힌 걸 쓴다.
금강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물길은 강경 무렵에서 서남으로 100리를 흘러 서해에 닿는다. 군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한 어선들은 이 물길을 타고 올라와 강경포구에 고된 노동의 결과를 풀어놓았다. 요즘도 김장철이면 젓갈 찾는 사람이 몰리는 강경 젓갈시장은 그 시절의 유산이다. 그러다 보니 이 일대 사람들은 바닷가 사람들과 식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삭힌 홍어를 나주·목포 일대에서 주로 먹는 걸로 아는 상식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부여 임천면이 고향인 한 선배는 일찍이 할아버지가 면장을 지내(면사무소 앞에 공덕비가 있다) 살림이 째지 않았는데 “우리 집은 삭힌 홍어 먹다가 살림 거덜났다”는 말을 할 정도로 자주 먹었다고 한다.
음식점을 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큰아들이 중학생이던 무렵(1968~1969년)이다. 처음에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구내식당이 없어 점심 먹을 데가 마땅찮아 ‘밥 좀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현재 식당 건물 건너편에서, 석성초등학교 입구이니 문방구와 잡화를 취급하는 가게를 했었다. 부여~강경을 오가는 시외버스 정류장 자리여서 매표도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들 점심밥을 지어줬다. 식당이 없던 동네니까 우체국·농협 직원들도 함께 이용했다. 고 여사는 “그이들이 먹고는 맛있다고 난리여. 식당 하라고 자꾸 떠다밀어서 결혼 전에 친정아버지 해 디리던 우어 하고 홍어 가지구서나 시작했다니께”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우어·홍어가 주력 메뉴지만 메뉴판에 적혀있지 않은 백반(6000원)이 여전히 잘 나간다. 백반은 배달도 한다. 회사·공장에서 시킨다. 식당에서도 주문한다고 한다. 백반상에 자주 오르는 청국장 맛이 일품이다.
자녀들 다 키우고선 그만하려 했다. 때마침 전기가 잘못돼 집에 불이 났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식당을 접을 생각으로 새 집은 아예 살림만 하는 구조로 지었다. 닫는다는 소식에 주변 관공서 성화가 여간이 아니었다. 강경(현재는 논산)·부여의 법원·검찰 사람들이 제일 난리였다. 경찰서도 안달을 했다. “안 하면 큰일난다는 겨. 꼭 좀 하시라고 안달복달하는 겨. 수배 내린다고 엄포까지 하더라니께, 글씨. 맛도 있고 멀리서 온 손님 모시기 좋았는디 문 닫으면 우덜은 워디로 손님을 모시느냐는 거여.” 타지에서 들고나는 사람들 많은 관공서들이 주로 그랬다. 부여읍내나 강경에서 10km가 채 안 되는 곳,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으니 공무원들이 시선 의식하지 않고 손님 모시거나 저녁 식사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근무하다가 정기인사로 떠난 사람들도 맛을 못 잊고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고 여사 손맛에 감탄하며 “이미자는 (연구용으로) 목 떼놓고 죽는다는데 아주머니는 손 떼놓고 죽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식당 문을 닫지 못 하고 자녀에게 대물림까지 하게 됐다.
식당을 안 하려고 지은 집에서 영업을 계속하다 보니 손님은 모두 방바닥에 놓인 두리반(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에 차린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방에 가득한 고가구와 함께 나이 든 세대에게는 추억 어린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리반에 올라오는 12~13가지 기본 찬은 고르게 맛이 있다. 모두 직접 만든다. 고 여사 자신이 사온 반찬을 먹지 못한다고 한다.
된장·들깻가루 넣고 무쳐 들기름으로 볶은 시래기무침은 1년 내내 상에 오르는 고정 반찬이다. 마을회관으로 이어진 식당 뒤 고샅길엔 커다란 고무 통 약 20개가 줄지어 있는데 거기 시래기를 저장해두었다. 고 여사는 “시래기로는 단무지 만드는 무청이 좋아. 대가 굵고 결이 물러서 씹는 맛이 좋거든”이라고 했다. 요즘엔 시래기용 무가 따로 있지만 4대강 사업을 하기 전 백마강 둔치에선 단무지 무 농사를 많이 했다. 수확 때 무청은 자르고 뿌리만 가져간다. 시래기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걸 주워다가 말리거나 삶아 갈무리해두고 겨우내 된장국이나 무침으로 해 먹었다. 부여읍내에 사는 친구는 시래기 좋아하는 나에게 단무지무청이 맛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고사리나물은 봄에 마을 뒷산에서 꺾어다가 삶아서 말려 둔 것을 쓴다. 그 산이 고사리 밭이라고 할 만큼 고사리가 많아 고 여사는 아침마다 운동 삼아 올라가서 꺾어온다고 한다. 국산 고사리 특유의 검질긴 듯 부드러운 질감에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구수함이 입에 붙는다.
가을 이른 서리 맞은 고춧잎과 잔 고추들을 섞어 거둬 담근 고춧잎장아찌는 시장에서 사먹는 것과 모양은 같아도 맛은 많이 다르다. 서리가 내리면 식물도 방어기제가 작동해 생애 주기를 앞당긴다. 열매는 영양을 모으고 잎은 왕성하게 광합성을 해 이들의 맛과 향이 진해진다. 음식에 쓰는 농산물은 이처럼 직접 재배한 것이나 동네 사람들이 농사지은 것만 사다가 쓴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자란 것들을 재료로 쓰니 집단 재배해 계절 없이 나오는 농산물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다르다.
우어회는 포를 떠서 미나리 넣고 고추장·참기름으로 무친 다음 참깨를 듬뿍 뿌렸다. 맛이 부드럽고 간이 잘 맞았다. 미나리 향과 직접 짜와 고소한 참기름이 맛을 도왔다. 웅어 살은 씹을 것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맨 김에 싸 먹어도 좋았다. 양념이 너무 진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회무침 맛의 핵심인 고추장은 보기에도 색이 참 곱고 반짝였다. 맛을 보라며 따로 내주는 것을 젓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맛이 아주 부드럽고 달곰했다. 고 여사는 “양건 고추만 쓰지유. 씨는 다 빼고 곱게 빻아서 찹쌀밥 지어서 담아유. 엿질금(엿기름)도 최고 좋은 걸로 쓰쥬”라고 자랑했다. ‘양건’이라는 말이 궁금해 농업용어사전을 찾아보니 ‘태양초’의 전문용어였다. 사전은 “양건(sun dry, 陽乾): 담배, 약초 또는 다른 수확물을 햇빛에 건조시킬 때 이를 양건이라 함”이라고 설명했다.
홍어 삼합의 홍어는 살이 보들 보들, 인절미 같았다. 참홍어라고 한다. 삭힌 정도는 중간. 2년 된 묵은지를 씻어서 함께 올렸는데 색이 아주 노란 게 씹으면 사각거려 삼합 맛의 한 축을 훌륭히 감당했다. 홍어는 국내산을 쓴다. 말해주지 않아도 먹어보면 국내산임을 알겠다. 홍어탕(1인 1만원)에는 칠레산을 쓴다. 홍어 애와 두툼한 살이 푸짐하게 들어간다. 국물에 들깨가루를 많이 넣은 게 다른 곳에서 먹던 것과 달랐다.
우어회·홍어회·삼합은 값이 같다. 2인 3만원, 3인 4만원, 4인 5만원, 5인 6만원. 다섯이 국내산 홍어회나 삼합을 6만원에 먹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것도 실한 반찬 12~13가지가 차려지는 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고 여사는 말했다. “손님들도 맛있다고 반찬이구 뭐구 상을 아주 싹 비워유. 좋은 재료 아끼지 않고 쓰니께 그런 맛이 나는 겨. 그러다 봉께 돈이 안 남어. 속 모르는 사람들은 손님이 그렇게 많은디 돈 벌어 다 뭐했냐 혀. 그 오래 식당을 혔어두 번 돈이 없어. 제우(겨우) 밥 먹고 살았지. 서울 가서 하라는 사람도 있고, 천안에 오면 다 준비해줄 팅게 몸만 와서 함께 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난 못 가유. 비싸게 받는 걸 못해서 못 가는 겨.”
홍어에 고 여사가 담근 동동주(1주전자 1만5000원)를 곁들이니 마음이 구름 위를 걷는다. 찹쌀·솔잎·누룩에 물만 넣고 담가 익으면 용수 박아서 뜬 다음 맑게 가라앉힌 술이다. 황금빛 맑은 술이 꽃 향 머금은 봄바람처럼 입안을 휘감아 돈다. 잡내가 전혀 없다. 많이 마셔도 머리 아프지 않다고 한다.
집 안에는 눈에 띄는 액자 4개가 있다. 개그맨 이경규와 개그우먼 김영희가 손님으로 왔을 때 고 여사와 찍은 사진과 교지(조선시대 임금이 사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내린 사령장) 2건이다. 교지는 복제본인데 둘 다 김창업(1658~1721)에게 벼슬을 추증한 내용이다. 큰방에 있는 교지는 건륭 57년(정조 16, 1792) 6월 3일 통정대부 수(守)충청감사 김이익의 증조부인 성균진사 김창업에게 사복시 정(正)의 벼슬을 내리는 내용이다. 침실에 걸린 교지는 가경 2년(정조 21, 1797) 고인이 된 가선대부 형조참판 김양행의 할아버지 증(贈)통훈대부 사복시 정, 행(行)동몽교관 통덕랑 김창업에게 통정대부 이조참의 자리를 추증(죽은 뒤 벼슬을 높임)한다고 씌어 있다.
벼슬 앞에 붙은 수(守)·행(行)·증(贈)은 ▷품계는 낮으나 직위는 높은 벼슬을 통칭하는 수직(守職) ▷품계는 높으나 직위는 낮은 벼슬을 통칭하는 행직(行職) ▷죽은 뒤에 추증한 품계·벼슬인 증직(贈職)이라는 표시다.
조선후기 화가이자 학자인 김창업은 호를 노가재(老稼齋) 또는 가재(稼齋)라 했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고 단원 김홍도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의 아들로 진사에 급제해 교관을 지냈다.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사약을 받아 죽음)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시문과 학문, 그림을 즐기고 가르치며 살았다. 생전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손자·증손자 벼슬이 높아지자 조상의 벼슬과 품계도 격을 맞춰 올려주는 법도에 따라 추증한 것이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인왕산 청풍계는 16~18세기 융성하던 안동김씨 집안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 동네 이름이 장의동이라 장동김씨(줄여서 ‘장김’)라 불렀다. ‘금관자 서 말이 나온 집안’이란 말이 있을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김창업의 증조인 청음 김상헌(1570~1652) 후손이 특히 그랬다. 부자 대제학, 부자·형제 영의정, 정승 15명과 판서 51명을 배출하며 조선후기 60년 세도정치의 주역이 됐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이다. 금(金)관자는 이품 관원이 사용했고 왕과 왕족, 일품 이상 관원은 옥(玉)관자를 썼다. 옥인동에는 지금도 ‘가재우물’이 있는데, 노가재가 즐겨 마셔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문벌 좋았던 집안으로 시집온 고 여사는 남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안동김씨 선비라 궂은 일을 못 혀. 아무것도 못 혀. 내가 다 했다니께.”
영업시간은 오전 11시30분~오후 8시. 외지 손님도 많아 찾아와 연중 쉬는 날이 없다. 설·추석 당일에도 문을 연다. 명절 쇠러 고향에 온 사람들이 옛 생각하며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 닫으면 어렵게 왔는데 헛걸음했다고 화들을 내서 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