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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부르면 새벽에도 연구실 달려와" '한국 로봇연구의 선구자' 변증남 UNIST 명예교수 별세

중앙일보

입력

1980년 여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한 연구실. 변증남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와 대학원생 5명이 긴장한 얼굴로 선이 복잡하게 연결된 기계 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움직인다”고 말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국내 최초의 로봇 매니퓰레이터(인간의 손·팔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로봇 장치)인 ‘카이젬’ 개발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로봇 하면 ‘태권V’만 떠올리는 로봇 불모지 한국에서 실제 움직이는 산업용 로봇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대학원생으로 연구에 참여했던 장태규(전자전기공학부) 중앙대 교수는 “이전에도 작동 후 전원이 타버리는 실패를 겪었다가 재도전 끝에 성공해 더 의미가 있었다”며 “평소 과묵한 변 교수님도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고 말했다. 변 교수는 10년 후 네 다리로 걷는 사각보행 로봇 ‘카이저’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23일 별세한 변증남 UNIST 명예교수. [사진 UNIST]

23일 별세한 변증남 UNIST 명예교수. [사진 UNIST]

한국 로봇계의 산증인 변증남 울산과학기술원(UNIST) 명예교수가 23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변 교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박사, 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로 2009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울산과학기술원(UNIST)으로 자리를 옮겨 석좌·명예교수를 지냈다. 그는 ‘한국 로봇계의 원로·선구자·대부’로 불린다. 카이저 개발 이후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로봇 개발에 힘써 휠체어가 달린 로봇 팔 ‘카레스’, 지능형 재활 로봇 ‘카레스Ⅱ’, 길 안내 로봇, 간호 로봇 등을 개발했다.
 KAIST 인간친화복지로봇시스템 연구센터와 한국 로봇학회 창립에 힘써 초대 소장·회장을 역임했고 국내에 퍼지이론(인간의 추론과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을 도입해 지능시스템 분야를 일궜다. 2002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자동화학술대회에서 성취상을 수상한 데 이어 이듬해 국제로봇심포지엄에서 조셉 엥겔버거 로보틱스상을 받고 국제퍼지시스템학회장을 맡는 등 외국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카이젬개발 당시 변증남(뒷줄 오른쪽) 교수와 연구원들. [사진 로봇신문]

카이젬개발 당시 변증남(뒷줄 오른쪽) 교수와 연구원들. [사진 로봇신문]

변 교수가 가르친 석·박사급 제자는 200명을 넘는다. 조영조 한국 로봇학회장, 김병국(전기·전자공학부) KAIST 교수, 서일홍 (융합전자공학부) 한양대 교수,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강릉분원장, 유범재 KIST 로봇연구단 박사, 송원경 국립재활원 박사 등 많은 제자가 스승의 뒤를 이어 로봇 연구를 하고 있다.
 제자들은 변 교수가 연구실에서는 무척 엄격했지만 학생 개개인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했다고 입을 모았다. 79년 카이젬 연구에 참여한 송상섭(전자공학부) 전북대 교수는 “당시 교수 숙소가 학교 옆에 있었는데 실험하다 문제가 생겨 연락하면 새벽에도 달려오셨다”고 기억했다. 카이스트 입학 때부터 변 교수와 인연을 이어온 조영조 회장은 “세미나 준비를 제대로 안해가면 5분 정도 지나 ‘전문가들의 시간을 빼앗았다’며 호되게 야단치셨다”며 “어떻게 하면 좋은 교육을 할까 늘 고민하는 마음이 제자들에게도 전해져 ‘Born to be a teacher(타고난 선생님)’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변 교수는 생전에 “인공지능(AI) 기술이 인간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특히 약자를 위해 로봇기술이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 교수의 아들 변영재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는 “과학자의 길을 가르쳐주신 인생의 본보기셨다”고 아버지를 기억했다. 장례식장은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5일이다. 문의 02-3410-6912. 울산=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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