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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산책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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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혜민 스님마음치유학교

혜민 스님마음치유학교

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을 좋아한다. 2000년대 후반 ‘별일 없이 산다’ ‘싸구려 커피’와 같이 특이한 제목을 한 노래들을 선보일 때부터 관심이 갔다. 고시원에서 살면서 그냥 막 나온 듯한 평범한 복장과 부스스한 수염을 한 리드보컬 장기하의 모습은 대형 소속사를 통해 데뷔하는 가수들의 잘 가꾸어진 외모와는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노래하는 스타일도 독특해서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보다 가사에 감정을 담아 읊조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이렇게 기존의 가수, 음악과는 차별되는 그들만의 스타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온몸으로 배워 세상이 세운 규칙을 비로소 뛰어넘을 때 #개인의 사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이 자기만의 색깔로 발현

가만히 보면 장기하와 얼굴들과 같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이나 글, 미술, 건축, 음식은 잠시 동안 보거나 듣거나 읽거나 맛보아도 금방 그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갖게 된 것일까? 우리도 그들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나만의 색깔로 인정받고 싶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일단 많은 예술가들은 데뷔 전부터 자신이 열광하는 우상을 갖고 있다. 장기하만 보더라도 신중현과 산울림 음악의 팬이었으며, 만화를 확대한 그림으로 유명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경우엔 어린 시절부터 피카소가 우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프카와 케루악 등 서양 작가들의 글을 탐독했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아방가르드 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우상이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우상은 훗날 작품 활동을 하는 데 큰 영감을 주고 결국엔 본인이 넘어야 하는 산이 되기도 한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맨처음엔 대부분이 취미 정도로 자기 분야의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장기하의 경우 2002년 대학교 밴드에 들면서 드럼 치는 것으로 음악을 시작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서양문학 책을 보는 취미를 갖다가 본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이 29세부터였다. 하지만 이들은 곧 이 일이 취미가 아닌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분야의 전문 교육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은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미술을 석사 학위까지 공부했고 뉴욕에서 성공한 셰프 데이비드 장은 뉴욕의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에서 요리 교육을 받았다.

물론 공부를 했다고 해서 자기만의 색깔이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색깔을 찾기 위해선 학교가 아닌 실제 현장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배워야 한다. 데이비드 장과 같은 셰프들은 자신의 식당을 열기 전에 유명 셰프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일을 직접 배운다. 장기하는 대학 밴드의 앨범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작가 류시화 시인도 자신의 시집을 내기 전에 인도 성자들의 수많은 명상 서적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마다 과정에 얽힌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이렇게 자기 분야에서 충분한 수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붙는 것 같다. 이때부터는 기존에 배운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함께 올라온다. 즉 자기 분야의 규칙을 다 배운 이들이 어느 선에서는 그 규칙을 깨고 넘어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자기 일이 어떻게 하면 같은 분야 선배들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면 이때부터는 관심의 초점이 남이 아닌 자기로 돌아와 본인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작품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을 깨고 자신만의 색깔로 새롭게 만드는 동력은 바로 각 개인의 아주 사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듯하다. 리히텐슈타인은 아버지는 만화를 못 그릴 것이라는 어린 아들의 말에 영감을 얻어 팝아티스트가 됐다.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은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천자문을 물방울과 함께 넣는 ‘회귀’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데이비드 장도 뉴욕에서 처음 모모후쿠 레스토랑을 열 때 프랑스 요리가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식 라멘이나 떡볶이와 같은 음식을 자기 스타일대로 만들어 뉴요커에게 선보였다.

이들의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사적이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왜냐면 인간의 삶은 누구나 다 사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적인 이야기를 대중과 솔직히 나누기에 친숙하게 다가온다. 장기하의 지난해 앨범이 떠오른다.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라는 곡에서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고백하듯 이렇게 노래한다. “남의 연애에는 이런저런 간섭을 잘해. 감 놔라 배 놔라 만나라 헤어져라 잘해. … 근데 니가 토라져버리면 나는 그냥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겠어.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만의 색깔로 언젠가는 인정받으시길 기원한다.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