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킹목사·아키노 … 암살범 잡혀도 수수께끼 남아

중앙일보

입력 2017.02.18 01:00

업데이트 2017.02.2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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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정남 피살로 본 ‘암살의 정치’
1968년 4월 4일 마틴 루서 킹(39세)

1968년 4월 4일 마틴 루서 킹(39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살면 좋겠지만 이제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분은 제가 산정(山頂)에 오르는 걸 허락하셨습니다. (중략) 나는 그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암살 장면 공개돼 충격
케네디 피격 소식, TV로 전세계 전파
이집트 사다트, 군대 사열 중 피살

공산국가 독살 흔해
2006년 영국 망명 러시아 정보요원
체내서 우라늄 100억배 방사능 검출

역사적인 비운 초래
오스트리아 황손 피살로 1차대전
40차례 암살 모면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인생의 절정기에서 내뿜는 듯한 이 연설의 주인공은 39세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이 연설을 하기 5년 전인 1963년 그는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을 했다. 이듬해엔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대중의 지지가 최고조에 올랐다. 그러나 테네시주 멤피스의 군중 앞에서 “오늘 밤 행복하다. 그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웅변한 다음날인 68년 4월 4일 킹 목사는 묵고 있던 호텔 발코니에서 한 인종주의자 전과범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지난 13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현재로선 암살 배후 세력으로 북한을 의심하는 이가 많다. 이른바 ‘정치적 암살’ 가능성이다.

킹 목사 사건으로 대표되는, 역사에 기록된 정치적 암살은 일정한 구성 요소를 갖춘다.

첫째, 당한 표적이 거물이다. 엄호 세력과 반대 세력이 그만큼 강력하다. 둘째, 범인의 살해 동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게 많다. 킹 목사의 경우 반세기가 지나도 미 연방수사국(FBI) 개입설 등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다. 셋째,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당대 상황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다. 킹 목사의 피살로 미국 내 분열과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로버트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당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두 달 뒤인 6월 5일 또 다른 총격범에게 희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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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보면 암살의 정치는 이 같은 요소들을 고려해 벌어진다. 죽은 사람은 바로 ‘그’이기 때문에 죽었다. 전쟁터에서 아무 상대나 없애고 보는 것과 다르다. 타깃이 명확한 살인이란 얘기다. 간혹 비틀스의 존 레넌 같은 셀레브리티도 암살당하긴 하지만 그럴 땐 아무래도 개인적 동기(정신질환자 포함)가 우선이다. 반면 암살의 정치는 특정한 정치적 목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미국의 저명한 군사정치학자 조지 프리드먼은 근본적으로 암살이 “적을 어떤 식으로든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성공할 경우 선거 같은 합법적 방식이나 숙청·처형 등의 폭압적 형식보다 ‘저비용 고효율’의 효과를 낸다. 거물이 ‘모르고 당했다’는 것은 그게 가능할 정도의 세력 불균형을 의미하기 때문 이다.

암살의 사전적 의미는 ‘몰래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당하는 상대가 모르게’라는 뜻이지 ‘세상 사람 모르게’는 아니다. 오히려 광장 집회 등 열린 공간에서 벌어질 때 암살은 정치적 퍼포먼스 효과를 더한다.

1983년 8월 21일 베니그노 아키노(50세)

1983년 8월 21일 베니그노 아키노(50세)

1983년 8월 21일 필리핀 야권 지도자 베니그노 시메온 아키노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떠돌다 3년 만에 고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81년 10월 6일 전승기념행사에서 군대 사열 중 수류탄과 자동소총 세례를 받아 사망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사망 당시 46세)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사망 당시 46세)

20세기 가장 유명한 ‘공개 암살’로는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피격이 꼽힌다. 63년 11월 22일 취임 3년차의 46세 대통령은 링컨 콘티넨털 오픈카에 탄 채 댈러스 중심가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인근 창고 6층에서 리 하비 오스월드가 쏜 총탄이 케네디의 등과 목을 관통했다. 케네디의 오른쪽 머리 일부가 날아가고 퍼스트레이디 재클린의 핑크빛 투피스가 피로 얼룩졌다. TV 등 미디어 매체가 막 가정에 보급된 시점이라 실시간 상황중계가 이어졌다. 마침 미국에서 일본으로 처음 위성방송이 시험돼 해당 소식은 태평양 건너 일본인들까지 충격에 빠뜨렸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피격 순간 영부인 재클린은 차량 뒤쪽 보닛 위로 정신없이 기어올라갔다. [중앙포토]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피격 순간 영부인 재클린은 차량 뒤쪽 보닛 위로 정신없이 기어올라갔다. [중앙포토]

공개된 암살이라고 해서 진범이 명확하게 가려지는 건 아니다. 아키노를 저격한 것으로 지목된 군인은 현장에서 사살됐는데 이 때문에 진실은 오히려 미궁에 빠졌다. 순식간에 총을 꺼내든 정부 측 경호원 누군가가 실제 범인일 수 있다는 의혹이 일었다. 킹 목사와 케네디 암살에도 현행범 외에 다른 공범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치 암살’은 이렇듯 종종 배후를 둘러싸고 음모론을 불러온다.

특히 암살의 책임을 역이용해 더 큰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흑수단’의 19세 단원이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책임을 신생 세르비아 정부에 돌려 세르비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불행히도 이런 시도는 양국의 후견인 격이던 독일과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번져 약 2000만 명(후방 민간인 포함)이 사망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암살 수단으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만 해도 칼이나 독약이 꼽혔다. 하지만 현대엔 총이 압도적이다. 거리를 둔 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암살의 역사』에서 조명한 20세기 23건의 암살 가운데 18건이 총을 동원했다. 독살은 3건, 수류탄(폭탄) 2건, 송곳 1건이었다.

1981년 10월 6일 이집트 전승기념일 행사에서 군대 사열 중인 안와르 알 사다트 대통령에게 총을 난사하는 암살범들. [중앙포토]

1981년 10월 6일 이집트 전승기념일 행사에서 군대 사열 중인 안와르 알 사다트 대통령에게 총을 난사하는 암살범들. [중앙포토]

특이하게도 독살은 모두 옛 소련 등 공산국가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 정보요원 출신인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죽음이 가장 기이하다. 2006년 영국으로 망명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던 그는 전직 FSB 요원 2명을 만나 차를 마시고 돌아온 뒤 쓰러져 3주 만에 숨졌다. 그의 체내에선 우라늄 100억 배에 달하는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210이 다량 검출됐다.

마하트마 간디(인도·1948년), 맬컴 X(미국·65년), 이츠하크 라빈(이스라엘·95년), 베나지르 부토(파키스탄·2007년)….

많은 학자는 이 역사적 거물들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정하곤 한다. 반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처럼 많은 이의 열망과 염원을 담은 저격도 허다했다.

암살 실패가 역사의 비운을 초래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를 겨냥한 암살 계획 및 미수는 영국·소련의 첩보기관, 폴란드의 지하조직 등 밝혀진 것만 40여 차례에 이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영화로도 제작된 1944년 7월 ‘발퀴레 작전’이다. 회의실 테이블 아래에서 폭탄이 터졌음에도 히틀러는 살아남았다. 암살 실패의 부작용은 컸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의 1년간 전사자 수는 그 이전의 5년을 합친 숫자보다 많았고, 유대인 학살은 전쟁 종반 극에 달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 패망 직전인 1945년 4월 30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S BOX] 레이건 총격범, 여배우 조디 포스터 관심 끌려고 범행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들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다만 최고 수준의 경호를 받기 때문에 실제 암살 성공률은 높지 않다. 2007년 하버드대의 벤저민 존스와 벤저민 올켄이 발표한 암살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1875년부터 2004년 사이에 전 세계 지도자를 상대로 298건의 암살이 시도됐는데 이 중 59건만 성공했다.

1999년 미국 『법과학 저널』에 발표된 논문 ‘20세기 후반 미국의 암살 사례 연구’는 대부분의 암살이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계획됐으며 충동적 암살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또 범인 중 25%가 일종의 망상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표적에게 근접해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의 경우 60%가 이런 증세를 나타냈다. 이들 중 44%는 우울증, 39%는 학대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암살범의 3분의 2는 다른 범죄로 체포된 전력을 갖고 있었다.

1981년 3월 30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존 헝클리에게 저격당한 직후 경호원들이 범인을 제압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1년 3월 30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존 헝클리에게 저격당한 직후 경호원들이 범인을 제압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치적 동기 없이 개인적인 과시용으로 대통령을 공격한 대표 사례는 1981년 3월 30일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한 존 헝클리다. 25세의 헝클리는 단지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열광적인 팬으로서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 같은 대담한 짓을 벌였다고 진술했다. 더 이상의 배후 세력도 밝혀지지 않았다. 레이건은 왼쪽 폐에 총알을 맞았지만 수술 끝에 회복했고 동정 여론에 힘입어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등 피습사건이 전화위복이 됐다.

※참고서적=『암살의 역사』(스티븐 파리시언 지음, 메이 펴냄·2010), 『세계사를 바꾼 28가지 암살 사건』(오다기리 하지메 지음, 아이콘북스·2011)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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